지난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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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당 김윤기 박사 소장전

  • 전시명:Indang's Possessions 'Deep Emotion'
  • 전시장소: 대구보건대학 인당박물관
  • 전시기간:2007-10-11 ~ 2007-10-28

 

 

인당 김윤기 박사 소장전 <Deep Emotion>

 

 

때로는 안단테로, 때로는 불멸의 에너지로...


가슴 가득 푸른 물이 드는 가을날, 사람의 마을로 가는 영혼의 풀씨를 보았나요?

생성과 소멸이 현재진형형인 이 계절은 정녕 무엇이든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만듭니다.

사소한 일상이 식어버린 커피처럼 권태롭게 다가오고, 익숙한 도심 고가(高架)까지도 생경하게

느껴질 때면 홀연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람이 분다, 떠나야 겠다’라는 시 구절을 되새기면서요.
 


그러나 2007년 가을은 마음 속 꾸렸던 여행 가방은 부려놓고,

아름다운 풍경 속으로 들어가야 할 모양입니다.

가을마당에 햇살 보자기를 펼쳐놓고 손님들을 초대했기 때문입니다.

보자기 위에는 가을 햇살보다 풍성한 빛을 선사하는 작품들을 올려놓았습니다.

질박한 삶이 신앙이었던 미의 순교자 박수근과 영혼의 무게를 덜어 낸 장욱진,

맑고도 그윽한 애정을 지녔던 순수한 사람 이중섭, 소멸을 꿈꾸었던 흙의 조각가 권진규와

강인한 생존 욕구와 생명의 기원을 제시한 조각가 문신에 이르기까지

40여점의 회화와 10점의 조각품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이 전시품들은 인당 김윤기 박사님이 남다른 애정과 심미안으로 수집한 미술품 가운데 일부입니다.

컬렉션을 한다는 명분으로 쌓아두기만 한다면 무슨 가치가 있겠습니까 보물창고에 가둬 놓고

빛을 보지 못하는 보물은 쓸모없는 물건에 불과할 뿐입니다.

미술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작품의 가치를 공유하려는 것이 특별전시회를 열게 된 가장 큰 이유입니다.

한국 미술의 큰 줄기에서 굵은 가지로 자리 잡은 분들의 작품을 한자리에 선보이는 이번 전시에서

뿌리 깊은 인간애와 거침없는 예술혼을 만나 나른한 삶에 감성의 불꽃을 지펴보시면 어떠실런지요.


 
가방을 꾸려야 하는 가을 여행은 잠시 접어두고, 빛바랜 창호지에 묻어 있는 가을 한 자락을

인당 박물관에서 ‘Deep Emotion'으로 물들였으면 좋겠습니다. 예술품 앞에 서면 도시의 소음도

낮은 숨결로 가라앉을 것입니다. 아마도 너무 행복해 마음의 레이더가 길을 잃을지도 모르겠군요.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계절, 인당 박물관이 때로는 안단테로,

때로는 활화산같은 에너지로 가슴 저린 사랑이 피어나게 해주리라 믿어봅니다.
 

 

 

                                                                                               대구보건대학 학장  보현  남 성 희
                                                                                      대구보건대학 인당박물관  관장  소 명 숙
 

 

 

인당 김윤기 박사

 

경북대학교                 농학과(1967~1974, 학사)
대구대학교대학원       지역사회개발학과 (1984~1986, 석사)
경기대학교대학원       체육학과 (1998~2001, 이학박사)

 


         사회활동

 

대구보건전문대학                                  부학장(1982~1988)
학교법인 근영학숙                                 이사장(1984~1987)
KBS 시청자위원회                                 위   원(1985-1987)
대구광역시 북구청 자문위원                    위   원(1986-1988)
대구보건대학                                         학   장(1988-2002)
대구광역시 사회복지협의회                     부회장(1993~1994)
미주한인회 총연합회 명예자문위원회       위   원(1995~1997)
월드컵유치 범국민운동본부                     고   문(1996~1997)
대구경북지역 학장협의회                        부회장(1996~1998)
대구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 유치위원회     위   원(1996-1997)
전문대학 학장협의회                               이   사(1999∼2002)
한국청년지도자연합회 자문위원회            위   원(1999~2002)
사단법인 북구문화원                               이   사(1999~2002)
대구지방검찰청 범죄예방 위원회              위   원(2000~2002)
대구경북지역협의회 운영위원회               위   원(2000-2002)
전국보건계전문대학장협의회                   부회장(2001~2002)
학교법인 영송학원                                  이   사(2001~2005)

학교법인 배영학숙                                  이사장(2002~2005)

(주)홍 성                                                회   장(2005~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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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미술이 걸어온 길

 

박영택

미술평론가, 경기대교수

 

   대구보건대학 인당박물관에서 마련한 이번 전시는 한국 현대미술의 중요 작품들이 상당수 망라되어있다. 해당 시기의 컬렉션으로서의 가치와 의미가 비교적 온전히 담겨있는 편이어서 상당히 충실한 소장이란 인상이다. 서양화와 조각이 주를 이루고 있는데 오윤의 판화 2점도 포함되어 있다. 한국 현대미술의 중심 작가들의 개성적인 작품들로 차려진 이번 전시는 지난 한국 근. 현대미술사의 역사와 궤적을 한 눈에 볼 수 있으며, 우리는 그 길을 통해 한국 현대미술이란 대상, 모종의 실체를 인식할 수 있게 된다. 해서 그 길을 따라 가다보면 지난 시간 한국 현대미술/작가들이 무엇을 고민했고 무엇을 미술이라고 생각했으며 그 사유를 어떻게 형상화했는지를 만나게 된다.

 

   대략 해방 이후 현재까지 활동하고 있는 이들은 누구보다도 당대 가장 개성적인 작품 활동을 펼쳤던 최고의 작가들이다. 이들의 이름과 그 명명성이 미술사의 행간을 채우고 있어서인지 사후에서도 여전히 최고의 작가로 인식되고 논의되는 작가들이며 고스란히 한국미술의 자양분이 되고 있다. 동일한 맥락에서 이들은 현재 한국 미술시장과 옥션에서 가장 많이 거래되고 인정받고 있다. 대표적으로 박수근, 김환기, 장욱진, 도상봉과 박고석 그리고 오윤 같은 작가들은 작품가격이 계속해서 치솟고 있다. 미술시장에서의 평가와 작품이 대중들, 미술전문인들에게 가장 많이 사랑받고 있으며 한국미술의 정체성이랄까, 모종의 특색을 대변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 시사 하는 바가 크다는 생각이다.

 

   이들은 한국의 과거의 전통과 급격히 단절되고 이후 서구 모던modern 문화의 수용을 통해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혼돈을 겪으면서 그 안에서 나름의 미술언어에 대한 독자성을 모색하기에 고심했던 작가들이다. 그들의 작품은 바로 그런 와중에서 탄생한 것들이다. 알다시피 모던이란 전통적인 것에 대립되는 삶의 여러 양상을 총칭하는 개념이다. 여기서 전통이란 서고의 경우 기독교적 모럴moral과 당시 정치적 지배세력 등의 세계관을 말한다. 르네상스 이후 지난 4, 5백년간의 유럽역사란 모더니제이션modernization의 추진을 통해 사회생산력을 확대하고자 한 역사였으며 이는 사회적 부와 삶의 조건을 개선하려는 모든 노력, 시도를 말한다. 그러므로 서구의 근, 현대회화란 진보와 발전을 앞세운 시민사회의 성장의 역사를 반영하는 미적 형식, 미적 이념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있어 모던혹은 ()/현대미술이란 무엇일까?

 

   근대미술은 전통적 의미에서의 서화書畵개념에서 서구적 혹은 근대적 의미의 미술개념으로 전이된 것을 말한다. 사회적으로 정착되는 예술형식으로서 미술 하나의 양식으로 자리한 것이다. 서양미술의 등장으로 동양화 또는 전통미술은 하나의 장르 혹은 양식으로 전략했고, 이후 서양화가 동양화를 근대적으로 대체하려는 시도를 보여 왔다. 이처럼 근대미술은 곧 서구미술의 유입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때 근대적 미술은 근대적으로 주체가 아닌 타자의 문화로 읽혀진다. 자아의 정체성을 발견하고 확보하기 위한 모든 근대적인 움직임에 준하는 행위가 오히려 타자의 문화로 대체되는 주체의 소멸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서구에서 모더니즘미술이 주체적 자각과 자아의 발견이라는 근대적 프로젝트에 상응하는 이른바 자율적 예술로 자리 잡은 데 비해 우리의 미술은 주체가 상정되지 않은 자율적 미술로 도입되었다는 얘기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의 근()대미술에서는 근대적 의미의 주체가 설정되지 못하고 미술가 혹은 예술가로서 화가는 그 사회적인 개체로서 개인적 주체의 상징으로만 있을 뿐이지 사회의 유기적인 소통적 기능을 담당하는 문화적 주체로서 자리잡지 못했던 것이다. 일제식민지 시기에 미술의 지향점은 다름이 아니라 반봉건성과 근대성이었다. 그 모범은 근대화의 고장인 서구였는데 우리의 경우 그 서구가 일본을 통해 굴절된 서구라는 사실 또한 문제였다.

 

   한국의 현대미술은 50년대 말부터 잡는 것이 통례화 되어 있다. 70년대에 이르러 본격화되는 한국현대미술은 모더니즘미술로 불리면서 추상미술이 주도적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50년대 이후 한국현대미술의 역사는 서구적 이념의 제 형식들에 대한 수용의 역사이며 막연히 서구적인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는 바로 미국적인 것의 수용과 이에 대한 갈등, 대립으로 보인다. 이후 우리에게 현대성의 추구라는 문제는 현대 사회의 모습이나 문제가 어떻게 서구 또는 미국미술의 경향을 흡수하여 표출해냈느냐의 문제로 치환되었다. 아울러 서구 사회에서 근대의 표징이었던 주체성의 문제 역시 오로지 개인적 정체성 속에서만 소화되었다. 서구모더니즘이 감수성의 해방’. ‘정체성의 확립’, ‘합리적 사회의 건설에 대한 열망을 표현해온 것에 반해 우리의 경우는 그와는 무척 다른 차원에서 이해되고 전개되었다.

 

   1970년대에 이르러 장르별로 구분된 미술활동이 구체화되는데 이 시기에 이르러 비로소 한국 현대 미술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근대화=서구화'라는 등식을 추구하면서 부딪쳤던 정체성 상실의 문제는 70년대 미술에서 매우 중요한 과제로 부각되었고, 그에 대한 실마리, 해결책으로 동양사상이나 한국적인 색채와 미감에 대한 논의들이 미술의 문제를 대체햇으리라 여겨진다.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한국의 이후 미국의 영향권 안으로 편입되면서 자연히 미술문화 역시 당시 미국에서 유행하는 영향력 있는 미술 사조를 수입, 수용과 이식하기에 급급해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서도 한국현대미술의 정체성이나 전통과의 연계지점 그리고 당대의 사회와 현실 안에서 미술의 수용과 그 의미에 대한 부단한 모색과 과정은 존재했고 그런 것들이 결국 현재의 한국현대미술을 만들었으리라.

 

   이번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이 바로 그들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들이 작품을 통해 다시 그 시절로 잠시 돌아가 이들이 겪어내야 했던 문화적 충격과 정신적 상처, 현실적 삶의 궁핍함 그리고 그 안에서의 치열한 작가로서의 생존과 그 편린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소장품의 반경이 다소 제한된 범주에 머물고 있는 아쉬움도 있지만 이들 작품들을 보면서 새삼 한국 현대미술만의 독특한 성격과 의미, 그리고 개별 작가들의 작품세계를 생각해보면 매우 소중한 자리가 될 것이다.

 

 

 


 

꽃의 눈, 나무의 귀
- 화가의 말을 찾아서

 

박기섭

시인

 

   화가한테 그림말고 말이 다 무슨 소용이랴. 시인이 시로 말하듯 화가는 그림으로 말한다. 하나 이렇게 단정하고 말문을 닫아 버리면 여백이나 여운이 전혀 없는 작품을 대하듯 속에서 치미는 답답함을 떨칠 길이 없다. 그림 밖의 말에서 우리는 인간적인 체취를 느끼고, 사유의 깊이나 작품의 지향을 가늠하기도 한다.

눈으로는 향기를 맡고, 귀로도 사물을 보는 것이 예술의 세계다. 그런 세계의 주체인 화가들이 남긴 말은, 이를테면 그림의 여백이 뿜어내는 향기이거나 오랜 여운 끝에 돌아오는 메아리와 같다. 그들의 말을 찾아가는 것은 그림 속에 없는 꽃의 눈, 나무의 귀를 만나는 일이다.

이미 그 이름만으로도 우리 현대미술사의 확고한 증거가 된, 스스로 꺼지지 않는 불꽃의 영원성을 확보한 화가들, 언제 어디서 보아도 일상의 나태를 흔드는 긴장과 안일의 뱃살을 찌르는 응결이 있는 그들의 그림들. 박수근의 나무와 이중섭의 ’, 김환기의 항아리와 장욱진의 ’ - 하나같이 한국적인 심상의 시계이면서 저마다 개성적인 미학의 성취를 이뤄낸 것이다. 이제 하나의 징검돌을 놓는 심정으로 그들의 말을 찾아간다.

 

   “나는 그림 그리는 사람입니다. 재산이라곤 붓과 팔레트밖에 없습니다. 만일 당신이 나 와 결혼해 주신다면 가난하지만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해 드리겠습니다. 나는 훌륭한 화가가 되고 당신은 훌륭한 화가의 아내가 되어 주시지 않겠습니까?”

 

   스물여섯의 박수근(1914-1965)이 이웃 처녀한테 쓴 구혼 편지다. ‘붓과 팔레트뿐인 현실의 가난에 그는 훌륭한 화가라는 꿈의 버팀목을 괸다. 비록 가난하지만 영혼을 사로잡는 행복을 기대한 것이다. 그러나 여섯 남매의 맏으로서 급격하게 기우는 가세를 떠받치기는 늘 힘에 부쳤다.

   박수근은 집요하게 따라붙는 가난을 비관하기보다 그 풍경을 화폭에 옮겨 누구도 이루지 못한 강렬한 독자성을 확보한다. 여기에 박수근 그림의 위대성이 있다. 대문 밖에서도 훤히 들여다 보이던 그의 집 쪽마루 아틀리에’. 생존의 비탈에 선 사람들한테서 독특한 서정의 존재성을 발견한 박수근은 한국인이면 누구나 기시감을 갖게 하는 토속적 미감의 세계에 몰입한다.

   어느 비 오는 여름날, 우산도 없이 버스에서 내린 박수근이 길가 과일장수에게로 가더니 한 군데서 세 개, 또 그 옆에서 세 개, 다시 그 옆에서 세 개, 해서 세 사람한테서 아홉 개의 과일을 산다. 우산을 들고 마중 나온 아내가 이상히 여겨 묻자, 그는 웃으며 이렇게 말한다.

 

   “한 아주머니에게서만 사면 다른 아주머니들이 섭섭해하잖아.”

 

   박수근은 그런 사람이다. 그러니 동네 아주머니들이 스스럼없이 그의 그림 속으로 돌아와 좌판을 펴고, 기름을 팔러 다니고 할 수밖에. 가난한 이웃에 대한 편견 없는 앶어, 이것이 박수근 그림의 미적 진정성이다.

 

   “나는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예술에 대한 대단히 평범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내가 그리는 인간상은 다채롭지 않습니다. 나는 그들 가정에 있는 평범한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물론 어린아이들의 이미지를 가장 즐겨 그립니다.”

 

   미술에 대한 박수근의 생각은 진솔하다. 잎은 다 떨군 채 근골만 앙상한 나무와 흰옷 입은 사람들. 그리고 그 배경이 되는 길과 집들. 박수근의 시선은 늘 삶의 근저에 닿아 있다. 소재에 대한 그의 애착은 일종의 정서적 항상성을 갖는다.

   박수근 그림의 미학적 특징은 소박한 구도와 단순한 묘사, 질박하되 예각이 살아 있는 강인한 선묘에 있다. 윤곽을 지우고, 원근을 뭉뚱그리는 형태감각 또한 독특하다. 물감을 칠한다기보다는 다독이면서 발라 올린다고나 할까. 거듭된 점착으로 마치 화강암의 표면과 같은 질감의 균질화를 이루며, 무채색의 무량한 깊이를 획득한다. 이러한 박수근의 화법은 이미 개성이 된지 오래다.

 

   “천국이 가까운 줄 알았는데... 너무 멀어... 멀어...”

 

   19655, 애년艾年을 갓 넘긴 박수근이 마지막 남긴 말. 간경화에 백내장, 게다가 한 쪽 눈의 실명까지. 이미 피폐할 대로 피폐한 몸이니 천국인들 가까우랴. 비단 박수근의 경우만은 아니지만, 생전보다 사후에 엄청난 평가를 받는 화가. 작금의 미술 시장에서 거푸 최고가 기록을 갈아엎는 그의 작품들. 걷잡을 수 없는 이 고공행진을 정작 고공에서 지켜보는 그의 심사는 과연 어떠할까.

 

   “아빠가 엄마, 태성이, 태현이를 소달구지에 태우고 아빠가 앞에서 황소를 끌고 따뜻한 남쪽 나라로 함께 가는 그림을 그렸다. 소달구지 위쪽은 구름이다.”

 

   1954, 일본에 있는 아내와 두 아들한테 쓴 이중섭(1916-1956)의 편지다. ‘길 떠나는 가족’(이 그림은 유채로 그린 것도 있다)이라는 그림도 함께 보낸다. ‘남쪽 나라는 이중섭이 피난 와서 머문 제주도라는 해석이 지배적이지만, 그냥 간절한 마음이 가 닿은 상징의 공간으로 읽어도 좋다. ‘길 떠나는 가족은 편지에서 한 말마따나 앞에서 황소를 끄는 아버지와 소달구지를 탄 한 가족이 나온다. 아버지로 그려진 화가 자신은 한껏 신명이 난 듯 한 손을 높이 치켜든 모습이고, 아내와 아이들은 꽃을 뿌리거나 비둘기를 날리며 마냥 즐거운 한때다. 어떤 물리적인 간섭이나 구속도 배제한 채 오로지 가족과 함께 하고자 하는 열망이 화면에 가득하다. ‘소달구지 위쪽은 구름이라는 표현이 그런 마음의 평화를 잘 보여준다. 그렇게 함으로써 기약 없는 이별의 슬픔을, 또 그 이별이 주는 무서운 외로움을 달래고자 한 것이다.

   성난 흰 소와 슬픈 황소’. - 이중섭은 학창시절부터 가져온 소에 유별난 관심을 평생 놓지 않는다. 소는 부지런한 우리의 민족성을 대변하는 존재요, 안으로 끓는 힘과 분노의 상징이다. 격렬하면서도 주저 없는 붓놀림에서 우리는 현실의 결핍에 끝내 굴종하지 않는 한 사내의 순정한 몸짓을 본다. 그에게서 그림은 곧 생존이요, 존재의 이유였다.

이중섭의 그림에는 소와 함께 게, 물고기, , 과일, 비둘기, , 그리고 발가벗은 아이들이 끊임 없이 등장한다. 이들은 화면을 홀로 떠돌기보다 대개 함께 어우러지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는 가혹한 현실의 상처와 상실감을 그림 속에서나마 행복과 평화의 메시지로 바꾸어 놓으려는 가열한 의지의 발현이다.

 

   “선배님, 화가가 그림이나 그리지 연설은 무슨 연설입니까?”

 

   동경 유학시절의 일화다. 모 씨가 어떤 집회에서 열변을 토하고 있는데, 한 젊은 미술 학도가 저벅저벅 앞으로 나가더니 느닷없이 따귀를 한 대 갈기며 이렇게 쏘아붙인다. 모 씨는 뒷날 북으로 간 길진섭이고, 젊은 학도는 이중섭이다. 그 무렵부터 이중섭은 서북지방 특유의 강직성으로 지사적 풍모가 유달리 강했다고 한다. 동경미술학원 시절에는 주위 일본인들의 시선은 아랑곳없이 태연히 우리말 노래를 부를 정도로 비상한 용기를 지녔다는 증언도 있다. 그의 윗도리 주머니에는 조선의 도편(陶片)이나 연적, 목각 같은 것이 가득 들어 있었다는 얘기도 곱씹어 볼 바다. 그는 실천적 민족주의자다. 그런 이주업이 무연고자가 되어 참담히 떠나야 할 정도로 척박했던 우리의 문화 현실을 새삼 되새겨 본다.

 

   “여러 날 편지 못 받은 것 같애요. 그래, 편지 쓰는 것도 쉽지 않아요. 또 우표 값도 궁하겠지. 여기, 지금 좀 추워요. 방안은 이렇게 짤짤 끓지만. 김장하네, 뭐하네 아마 심신이 피로하겠지?”

 

   김환기(1913-1974)가 미국으로 떠난 1963년 세밑에 쓴 편지의 한 대목. 구절마다 안쓰러움과 섭섭함, 그리움과 기다림이 사정없이 갈마든다. 지극히 사적인 문맥이지만 그 속에서 여의치 못한 당시의 처지가 짐작되는가 하면, 물씬한 인간미가 묻어나기도 한다. 바로 이런 것이 사신私信이 갖는 매력이 아닐까 싶다.

 

예술이란 강력한 민족의 노래인 것 같다. 세계적이기에는 가장 민족적이어야 한다.”

 

   간결한 두 문장에 김환기가 가진 사상의 요체가 함축되어 있다. 예술에 대한 그의 인식은 이처럼 가장 민족적인 것에서 출발한다. 경계를 허무는 세계성의 단초도 여기에 있다. 이런 자각은 서른을 넘어서면서 한국의 자연과 정서를 적극적으로 형상화하는 데서 구체화된다.

 

   “글을 쓰다가 막히면 옆에 놓아 둔 크고 잘 생긴 백자 항아리 궁둥이를 어루만지면 글이 저절로 쓰여진다.”

 

   그럴 정도로 김환기는 백자를 좋아했다.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거의 벽에 가까웠다는 표현이 맞을 성싶다. 특히 달항아리의 조형화가 두드러진다. 어디에 놓이든 금세 배경을 흡수하고, 스스로 그 배경에 녹아 드는 항아리. 거기에 달과 매화, 산과 구름, 나무와 시냇물, 사슴과 학 같은, 그가 영원한 것들이라고 부르던 갖가지 물상들이 어우러진다. 그것이 그가 구축한 한국적 화면의 한 전형이다. 항아리 속에는 숱한 생각들이 담기지만, 때로 그 속에 담긴 것을 슬쩍 끄집어 내기도 한다. 수화樹話는 그의 아호. ‘나무라고 말하는 사람이란 뜻일 테지만, 이 때의 나무는 그냥 나무만이 아니고 전체 자연의 표상이라 할 것이다.

 

   “- 두 번 붓이 안가는 습관을 가져야겠다.”(1965.1.18)

   “예술은 질서와 균형이다.”(1965.1.19)

   “선과 점을 좀더 밀고 가보자.”(1965.1.24)

 

   뉴욕 시절에 쓴 일기에서 몇 구절을 뽑아 본다. 그 시절의 김환기 역시 가난에 부대꼈다. 돈이 적게 드는 그림을 생각한 끝에 꼴라주도 하고, ‘파피에 마셰로도 그렸다고 할 정도니까. 선과 점과 면으로 표현되는 그의 추상 세계는 그런 궁핍 속에서 완성된다. 앞서 보여준 한국적 심상들이 차츰 추상의 세계로 전화한 것이다.

   김환기의 추상은 한 개의 작은 점에서 시작한다. 그 점이 모여 선이 되고, 선이 꿈틀거리며 면을 이루고, 마침내 거대한 군집의 우주로 폭발한다. 점을 찍으며 꿈을 찍고, 그리움을 찍고, 우주적 질서와 균형을 지향하는 것이다. 그가 좇던 무수한 별과 별빛들. 19747월 어느날, 그는 끝내 그 별빛을 따라 하늘로 가고 만다.

 

   “나는 심플하다.”

 

   장욱진(1917-1990)이 평생 입에 담고 살았다고 할 만큼 자주 한 이 한마디. 따라서 이 말에는 그의 그림과 의식이 집약되어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단순함은 그의 그림의 시작이자 끝이다. 핵심을 잡되 그것을 가장 단순한 형태로 드러내는, 그러면서 한 순간도 창조적 긴장을 놓치지 않는 그림. 꼭두새벽에 일어나, 맨발로, 방바닥에 쪼그려 앉아, 그리는 그림.

   집과 나무, 까치와 참새, 개와 소, 달과 돼지, 노인과 아이, 해와 달, 산과 강. - 이런 친근한 소재들이 한데 어우러지고 포개지면서 장욱진의 그림 세계를 이룬다. 그의 그림은 어린아이 같은 천진성과 원시의 상징성을 동시에 실현한다. 꿈과 자유, 사랑과 평화를 추구하는 그의 그림 세계는 시의 세계와 아주 가깝다. 우리가 그의 그림에서 말할 수 없는 시정을 느끼는 것도 우연만은 아니다.

 

   “양각을 하게 되면 손이 자꾸 가서 군더더기가 나오지만, 음각은 칼이 한번 지나가면 끝나는 일이어서 나의 체질에 어울린다.”

 

   장욱진은 목판화에서 우연득작偶然得作을 경험한다. 양각보다 음각에 끌린다는 표현에서 생래적인 그의 단순성이 드러난다. 박수근과 마찬가지로 그 또한 평면구도를 고집하는데, 이는 자연과 인간을 동일시하는 태도다. 어두운 밤하늘, 그 무한 자유와 동심의 세계를 홀로 나는 새. 오욕과 허욕을 다 내려 놓은 채 영원과 끊임없는 대화를 시도한 사람, 그가 바로 장욱진이다.

   1977년 여름, 장욱진은 양산 통도사에 가서 경봉 스님을 만난다. 만나자 마자 스님은 대뜸 선문禪門을 던진다.

 

   “뭘 하는 사람이냐?”

   “까치를 잘 그리는 사람입니다.”

   “입산을 했더라면 진짜 도꾼이 됐을 텐데.”

   “그림 그리는 것도 같은 길입니다.”

 

   거침없는 대답에 경봉 스님은 하다고 웃으면서 비공非空이라는 법명을 내린다. 텅 비어서 오히려 가득한, 텅 빔과 가득함이 다르지 않다는 것. 짧은 대화지만 그 속에서 우리는 범속을 넘어서는 어떤 마음의 경지를 엿볼 수 있다.

 

   “잠깐, 움직이지 말라. 까치가 날아간다.”

 

   장욱진이 중광 스님을 만나서 했다는 이 말도 여간 게 아니다. 그림으로 문답을 하다가 즉석에서 중관의 옆모습을 그리면서 툭 던진 말이라나. 그 때 남긴 초상소묘를 보면, 중광의 머리 위에는 참말로 까치 한 마리가 앉아 있다.

 

   “나이는 먹는 게 아니라 뱉어 버리는 것이다.”

 

   장욱진의 나이 쉰일곱일 때 나이를 묻자 일곱 살이라고 했다는 얘기. 그 얘기 끝에 흔히 덧붙이는 말이다. 나이가 들면 생각마저 굳어지게 마련이니, 그가 정작 두려워한 것은 그 점이 아니었을까. 나이에 묻은 관념 따위는 다 지워 버리고 늘 무구한 일곱 살에 머무르고자 한 사람. 199012, “당신 성질처럼 푸드득, 그렇게 금방 돌아갔다.”는 아내의 말처럼 그는 그렇게 이승을 하직한다. ‘그 사람에 그 그림其人其畵이란 말은 아무래도 장욱진을 두고 한 말 같다.

 

 

 


 

전인권의 아름다운 사람 이중섭


 

남성희

대구보건대학 학장

 

   이제야 가을이 제 빛깔로 창문을 두드리지만 나는 지난 여름에 읽은 한권의 책 때문에 일찌감치 가을을 앓았다. 그림을 좋아하는 남편에게 선물할 요량으로 산 그 책은 표지에 네잎 클로버처럼 두 팔을 벌려 끌어안고 있는 네 명의 가족을 그려 넣은 전인권의 아름다운 사람 이중섭이었다. 표지 화풍이 눈에 익기는 했지만 내가 애지중지하는 은박지에 그려진 군둥화와는 다르게 한 가족과 그들을 그리고 있는 작가 자신을 묘사해 놓았기에 눈길이 쏠렸고 손에 집어 들자마자 단숨에 읽어 내려가게 되었다. 마침 올해가 이중섭 화백의 추모 50주기가 되는 해이기도 하고 연초에 있었던 위작 시비로 그에 대한 평가가 각종 언론에 가십 위주로 다뤄지는데 마음이 상해 있었던 터라 읽고 난 후의 가슴앓이는 실연의 상처보다 더 진한 흉터로 남게 되었다.

 

   지은이 전인권은 미술 전문가가 아닌 정치학을 전공한 사람이지만 호암 갤러리에서 있었던 이중섭 30주기 기념 전시회에서 그를 처음 만난 이래 끊을 수 없는 인연을 맺게 된다. 그에 대한 작가의 관심을 천재 예술가의 특별한 정신세계 규명이 아니라, 그가 한국이란 공동체가 안고 있는 정신세계를 남김없이 표현하고 있다는 확신 아래, 이중섭이 한국의 일반적 미의식을 대변한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그의 작품 세계, 그의 생애, 그의 예술을 지배하는 정신적 배경을 규명하려는 목적으로 써 내려갔다.

그 결과 다소 혼란스럽기는 하지만 책 말미에 작가는 이중섭에 대해 그가 늘 그렸던 소처럼 우직했고 어린애처럼 순수했다고 평가했다. 또 그와 사귄 모든 사람들에게 티 없이 따뜻한 인정을 베풀었으며 거기에 그치지 않고 소·물고기··나무·무생물에 이르기까지 맑고도 그윽한 애정을 나누었던 순수한 사람이었다면서 글을 맺는다.

책을 읽는 동안 비록 짧은 순간이었지만, 나는 내내 이중섭 화백의 아내 야마모또 마시꼬(이남덕)로 살았다. 유학시절 일본 화단畵壇 조차 놀라움을 금치 않았던 우리가 낳은 위대한 예술가인 그가 피난시절 제주도에서 잠시나마 가족들과 행복한 시간을 나눌 때는 마치 내가 갓 잡은 게와 물고기를 요리해서 가족의 밥살을 준비해야 할 아낙의 마음이 되었고, 경제적인 이유로 가족을 일본으로 보내고 여관방과 정신병원을 전전하며 몰락해 갈 때는 밀항선을 타고 와서라도 그를 간호하고 작품 활동으로 이끌어야 했는데 하는 후회와 아쉬움에 가슴을 쳤다.

죽음을 눈앞에 둔 1955, 그가 친구 구상具常 현실 세계의 무능을 예술로써 위장하고, 그림에 있어서도 사실성의 미술을 추상화로써 호도했다고 심각한 반성을 했을 때 그를 그렇게 방치한 사람이 바로 내 자신인 듯 해 찢어지는 가책을 느끼기도 했다.

 

   이제 사람들은 다시 객관적인 독자로 돌아와 냉정을 되찾은 것 같고 여기저기서 이중섭을 재조명하자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 이쯤에서 나도 여러분에게 이 책을 권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위대한 작가의 영원한 영적 동반자인 그의 아내, 그의 두 아들, 혹은 그 자신으로 각자의 역할을 수행할 기회를 드림과 동시에 고통스럽게 맡아 왔던 이남덕 여사의 역할에서 홀연히 벗어나고자 한다.

비록 많은 독자가 나처럼 비극의 주인공이 되어 황량한 가슴을 부여잡을 테지만 이 또한 한번쯤 겪어 볼 소중한 경험이 아니겠는가?

 

 

 

 

 

돌 속에 숨은 영혼의 숨결을 찾아

 

손영학

인당박물관 큐레이터

 

 

 

눈을 밖으로 곧바로 뜨고 앞을 보며

자신의 속을 들여다보고 있는 얼굴

인간 속에는 심지가 있는가

상처가 있는가?

두상이 더 오르려 하자 권진규가 얼른 목에 끈을 맸다.

권진규는 테라코타가 되었다.

속이 빈 테라코타가

인간의 속에 대해 속의 말을 한다

인간에게 또 어떤 다른 속이 있었던가?

 

                                           황동규, 권지규의 테라코타

 

 

 

   일찍이 예술을 평가하는 가치 기준을 숭고성에 두던 르네상스 시절, 미켈란젤로와 다빈치는 회화와 조각의 우열을 두고 견해를 달리했는데, 미켈란젤로는 조각이란 회화의 등불이며 둘의 차이는 해와 달의 관계만큼 크다고 주장했다 한다. 이런 주장보다 더 인상적인 것은 바로 자신은 대리석으로 어떤 형태를 만들어내지 않았다는 그의 말이다. 처음부터 그가 깎아내는 덩어리 속에 인물상들이 감추어져 있다고 생각하고 조각가로서 그가 한 일은 단지 그 형상을 덮고 있는 것들을 제거해 주었을 뿐이라는 것. 그러기에 곧 감정이 폭발할 듯 격렬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그의 조각상들이 불편한 자세에도 불구하고 단순하면서 안정돼 보이는 것이리라.

 

   돌 속에서 숨어있는 상을 찾아낸다는 이 말은 노천박물관이라 불리는 경주 남산의 수많은 마애불상을 대하면 절감하게 된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정을 대고 쪼아낸 것이 아니라 막 바위에서 솟아난 듯 얕은 돋을새김에 엷은 미소를 띤 부처의 얼굴을 대할 때면 뛰어난 조각이 우리에게 주는 감동의 무게를 절절히 느낄 수 있다.

 

   조각의 역사를 굳이 이야기하라면 아마 인간 신체를 표현하는 방법의 변천사라고 할 수 있다.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로부터 그리스 · 로마의 조각상을 통해 우리는 인간의 형상에 대한 찬미를 읽을 수 있다. 그러기에 라오콘 군상이 발견되었을 때 빙켈만은 고귀한 단순과 위대한 고요라는 말로 그의 감동을 압축적으로 표현했다. 헤겔은 고전주의 조각을 일컬어 독자적인 재료로 성령을 형상화하는 놀라운 작업이라고까지 추켜세운다. 이쯤되면 자신의 조각상과 사랑에 빠진 키프로스의 왕 피그말리온의 이야기에 공감이 간다. 공간을 차지하는 형체의 양감과 생명력이 갖는 힘이 바로 조각의 특성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금방 이야기가 파악되고 색감이 느껴지는 회화에 비해 조각은 다소 우리에게 어렵게 느껴진다. 하지만 어떤 것이든 관심을 갖고 다가갈 때 그때 느껴지는 존재감은 달라질 것이다. 비록 회화와의 경계선이 의미를 잃어가는 것이 현대의 추세이지만 조각은 여전히 공간을 차지하는 덩어리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마치 등산을 하면서 계곡을 만나고 숲길을 걷고 또 봉우리를 올려다보듯 그렇게 탐험과 탐색을 해야 하는 영역이라고 생각하고 접근하면 된다.

조각은 단순히 인체나 자연의 모방이 아니라 자연으로부터 영감을 얻어 하나의 예술작품으로서 인간의 손에 의해 설계된 창조물이다. 조각은 보는 각도에 따라 서로 다른 모습들이 솟아올랐다가 사라지면서 서로 어우러지는 조화로움을 보여준다.

 

   뛰어난 조각 작품에는 우리의 시선을 끄는 여러 가지 요소가 있다. 인물상을 보면 근육이나 뼈, 주름살, 얼굴 표정, 머리카락, 옷주름 등이 우리 눈을 의심할 정도로 정교하게 묘사되어 있다. 충상작품이라해도 그 이음새나 다른 재료와 접합되는 부분과 작품을 둘러싼 주변 공간 등에서 조각가의 탁월한 감각과 정성을 볼 수 있다. 미술사에 이름을 남긴 걸작일수록 더욱 그러하다. 시각에 더 나아가 촉각으로 인지할 수 있다면 그야말로 전율에 가까운 감동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오늘날 우리들이 직접 만지는 것이 허용된 작품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특히 미술관에서). 가능한 모든 위치에서 조각의 모든 부분을 실제 손으로 직접 만져보는 것처럼 느낄 수 있도록 눈의 감각 훈련이 필요하다.

 

   그 다음으로 조각 감상의 주요한 포인트는 바로 빛이다. 빛이 작품에 미치는 특별한 효과에 의해 작품의 또 다른 이미지를 식별해 낼 수 있다. 하나의 작품을 아침 동틀 무렵 바라볼 때와 석양 무렵 바라볼 때의 느낌은 전혀 다를 것일 수 있다. 서산 마애삼존불의 미소가 빛의 각도에 따라 어떻게 변해가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작품화된 대상은 우리 주변의 친근한 소재일 수 있고 아니면 너무 일상적인 모습이어서 무심코 지나쳐버리는 것일 수 있지만 우리는 조각가의 천재성을 통해 예전에는 그 진가를 알지 못했던 인간 형상의 아름다움에 눈을 뜨게 된다. 그리고 조각가가 창출해 낸 가장 이상적인 형태를 보면 우리 자신의 품격까지 고양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번 전시를 통해 우리는 윤영자에서부터 문신, 권진규, 전뢰진, 민복진, 강관욱, 최종태, 유영교 등 우리 근현대 조각사에 한 획을 그은 작가들의 작품을 만나게 된다. 이들은 현대조각의 한국적 전통 확립이라는 문제를 나름의 성과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한국적인 어머니상을 통해 토속성을 넘어 종교적 숭고미를 부여한다든가 조각가의 조형의지를 가장 잘 드러내는 소재라고 할 수 있는 테라코타를 통해 전통 조각을 재현하려 한 점, 혹은 아름다움의 탐구로서가 아니라 여체의 힘을 조형의 목표로 다룬 시도를 통해 우리 조각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 이끌어 온 작가들의 역작이 한 자리에 모였다.

 

   ‘조각가는 자신의 손 안에 견고한 형체를 움켜쥐고자 끊임없이 생각하고 포착하는 사람이라는 헨리무어의 말은 작가의 고뇌와 노력을 대변해 준다. 이 가을 조각이라는 새로운 대상과 교감해보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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