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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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보건대학 대구아트센터 특별소장전

  • 전시명:한국의 궤
  • 전시장소: 대구보건대학 대구아트센터
  • 전시기간:2006-05-09 ~ 2006-05-31

 

 

대구보건대학 대구아트센터 특별소장전  <한국의 궤>

 

 

오래된 향기를 찾아서

 

지난해 가을,본 대학 대구아트센터 소장품으로『한국의 장롱』을 펴낸데 이어 두 번째로 『한국의 궤』를 펴내게 되었습니다.

장롱이 안방 중심의 가구였다면 궤는 어느 한 장소에 국한된 것이 아닌,소용되는 곳에 따라 놓였던 가구입니다. 궤는 목리가 좋은 넓고 두꺼운 판에 무쇠로 된 큼직한 장석들이 어울려 순박한 멋을 주는 건강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완벽한 균형과 담백함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궤는 조선 목가구 의 무게중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가구문화는 지리적 여건과 사계절이 뚜렷한 풍토적 환경 속에서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독특한 미를 형성했습니다. 궤 역시 우리나라 곳곳에서 만들어졌는데 팔도八道로 분류되고 거기에서 만든 지방에 따라 다시 세분화되어 불렸습니다. 그래서 저마다 다른 조형양식을 다채롭게 살펴볼 수 있는 즐거움을 안겨 줍니다.

우리 전통 목가구가 갖고 있는 미덕으로는 쓰임새의 정직성과 구조의 견실성,소박하고 간소한 아름다움을 꼽습니다. 궤는 이러한 미덕을 충실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집집마다 놓여져서 가장 요긴하게 쓰였지요. 오래된 궤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이것을 만들었을 소목장과 또 이것을 아껴 쓰던 옛 분들과 정신적인 교감이 이루어집니다. 현대적 생활 공간에서도 마음에 드는 옛 가구가 놓여 있는 걸 보면 막혔던 숨통이 트이고,마음이 풍요로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한낱 옛 것일 뿐이라는 생각을 지우고 궤의 세계로 들어가보십시오. 생생한 생명력으로 우리곁으로 다가와 우리의 마음과 삶을 여유롭게 만들어줄 것입니다.

 

대구보건대학 학장   남 성 희

 

 

 

A Touch of the Past

 

After <Korean Wardrobes> last year, a publication on a series of collections by Daegu Art Center at Daegu Health College, we are now pleased to offer the second series - <Korean Chests>.

Whereas a wardrobe could be found at the center of the living-room-oriented traditional Korean household, a chest is not confined to one spot in the house: its location in the house depends on what it is to be used for. Refreshingly simple with its transparent and plain appearance, it nevertheless possesses unpretentious beauty. Thanks to its wide and thick wood plate harmonized with a large Korean traditional decoration metal made with cast iron, it exudes perfect balance and durability. For this reason, we often consider Korean chests as the central piece of Joseon woodin furniture.

The traditional Korean furniture owes its unique beauty to the natural environment: the country’s geological characteristics and four distinctive seasons. Korean chests used to be made everywhere in the country; they were often named after the province in which they were made, and were even further distinguished from one another based on the local region in which they were produced.

Searching for differences among these chests based on their origin can give one a rare joy.

When people talk about the advantages of traditional Korean wooden furniture, they often cite their functional character, durability, and simplicity. Korean chests possess these qualities. Every household in the past had one and used it on a daily basis. Beholding an old chest allows us to be one in spirit with those who made and used it. An old but lovely Korean chest, even when displayed in a place with a modern design, can add depth, character, and beauty to one’s living space.

Korean chests are not just old things; they are priceless presents from a glorious past. Welcome these presents into your living space and watch them breathe new life into it.

 

Nam, Sung Hee

Dean of Daegu Health Colle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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궤에 관한 몇 가지 단상 斷想

 

손영학
대구아트센터 큐레이터

 

   1. 궤라 이름 붙여짐은

 

   궤란 두껍고 넓은 판재로 결속하여 네모지게 만든 것을 일컫는 말이다. 널과 널끼리 짜 맞추고 더욱 단단하게 하기 위해 여러 가지 금속장식을 붙였다. 튼튼하게 만들어 기물을 넣고 여물게 보관하기에 알맞은데다가 꺼내기에도 편리하다. 그만큼 실용적인 면에 치중해 제작되어 졌다.

   솜씨 좋은 소목장이 아니라도 장롱만큼 만들기가 어렵지 않고, 값도 비싸지 않다보니 집집마다 하나씩은 있었다. 그러면서도 아낌없는 사랑을 받았다. 중요한 혼수물목 가운데 하나로 쳤고, 귀히 쓰면서 대물림해왔다.

   궤는 우리말에서 반닫이, 궤짝, 상자 혹은 함, 작은 장 등으로 불려졌다. 자전字典에서는 갑으로 풀이하였는데, 어원을 거슬러 올라가 살펴보면, 서경書痙의 우공禹貢편에 우 임금이 치수治水를 마친 후 형주에서 청모菁茅를 공물로 바칠 때 청모를 싸서 궤에 넣어 바쳤다는 포궤청모菁茅’라는 말이 나타난다. ‘포궤청모의 주에서 는 갑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와 궤는 글자는 다른지만 갑으로 풀이한 뜻이 같은 것으로 보아 용도는 거의 비슷해 보인다.

   우리 선조들은 궤를 궤자로 음차音借해 쓰기도 하였다. 란 글자획이 번잡하여 궤로 대신했음인데, 사실 궤의 본뜻과 용도는 전연 다르다. 앉을 때에 팔꿈치를 얹고 몸을 기대는 물건이거나, 제사나 연향 때 희생이나 음식을 얹어 놓는 상으로 조와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한 글자로만 표시하였다면 그렇게 보겠지만, 책궤冊?, 문서궤文書?, 衣服?등으로 표기했을 땐 이 궤자는 궤의 음차 된 글자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여하튼 궤라는 이름은 귀한 것을 넣어 두는 나무상자라는 글자쯤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는 궤가 세워 놓은 장 종류의 수궤竪櫃와 반대로 눕혀 놓은 와궤臥櫃로 구분되는 형태적 특성이 내재되어 있다. 와궤는 앞닫이(반닫이)와 윗닫이로 구분된다.

   흔히 궤를 반닫이(앞닫이) · (윗닫이)로 나누는데 이 도록에서는 궤를 포괄적인 의미에서 분류해서 구분했다.

 

   도록에서의 궤의 범주

                       앞닫이(반닫이), 윗닫이(웃닫이), 곡궤(뒤주)

 

   일반적인 궤의 용례

                       궤짝, 상자, , 작은 함, 책궤, 돈궤, 서류궤, 제기궤, 나락궤, 곡궤, 곶감궤

 

   여기서 앞닫이와 윗닫이를 먼저 살펴보자. 앞닫이는 앞면이 반으로 나뉘어져 열리고 닫히는 것을 말하고, 윗닫이는 윗면에서 열리고 닫히는 것을 일컫는다.

 

   요즘 흔하게 부르는 말 가운데 반닫이가 있다. 반닫이는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반쪽으로 닫히는 것으로 매우 포괄적 의미를 가지지만, 사전적인 정의로는 나무로 짜서 물건을 넣어두는 정 · 장방형의 단층 궤로 앞널의 위쪽 절반 이상 열리기 때문에 반닫이라고 해도 국이 틀리진 않는다. 요즘은 보편적으로 앞닫이가 곧 반닫이로, 윗닫이는 궤로 불리고 있다.

   앞닫이든 윗닫이든 사용자가 문을 열기 위해서는 앉아서도 충분한다. 좌식생활 문화에 맞추어진 한 예를 보여주는 가구이다.

 

   앞닫이

   통상적으로 반닫이로 불린다. 경기도, 전라도 지역에서 앞닫이라 부른다. 경상도에서는 방심하고 열면 여닫이 널판이 떨어지는 소리가 벼락 치는 것 같이 요란하다 하여 벼락닫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우리가 흔히 부르는 반닫이는 일정한 쓰임새로 인해 크기에 있어서는 큰 변화가 없으나 장석에 있어서는 지역별 특성이 두드러진다.

 

   윗()닫이

우리가 궤라고 부를 때는 이 윗닫이를 지칭한다. 윗문이 반만 열리기에 반닫이라고 할 수도 있다. 모양새만 보고 포괄하여 돈궤라 부르는 이도 있는데 이는 개별성을 고려하지 않은 채 일반화시킨 예이다.

 

   용도에 있어서 앞닫이는 주로 옷가지들이었으나 귀중한 문서나 잡다한 것을 보관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이를테면 장롱의 기능을 많이 하고 있었던 셈이다. 친정어머니가 지은 옷, 시집올 때 가져온 옷 중 가장 솜씨 좋은 것은 제일 밑에 고이 모셔두는데 이것을 농지기라고 한다. 죽을 때까지 한 번도 입어보지 않다가 죽을 때 입고 가는 것이 농지기다. 서민층에서는 그 위에 이불이나 자질구레한 것을 올려놓기도 했다.

   윗닫이는 무엇을 갈무리할 것인가를 미리 염두에 두고 만들긴 해도 사용하면서 넣는 기물이 달라진 예도 많다.

   용도가 다르다보니 놓인 곳도 달랐다. 앞닫이는 안방, 사랑방, 대청, 부뚜막 상부 벽장이고, 윗닫이는 고방이나 광, 헛간, 바깥이나 별도의 공간에 많았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놓인 장소를 엄밀히 구분하기는 어렵다. 궤는 방 이외의 공간에 주로 놓였는데 가령 책을 넣어두었던 책궤는 서당에도 있었고, 사랑방에도 있었다. 돈궤라고 부르는 윗닫이는 방에 놓이기도 했다. 윗닫이의 경우에는 놓이는 위치에 따라 무엇을 담느냐가 결정되었다.

 

   앞닫이

   옷가지 외에도 옷을 짓기위한 여러 가지 잴와 기구, 패물, 귀중품이나 문서, , 은붙이 등 일상생활에서 소중히 쓰는 것을 넣었다.

 

   윗닫이

   돈이나 책을 보관하거나 나락(곡식), 제기, 곶감, 화살, 농기구, 표직물(무명, 삼베, 모시), 1차 가공직물 등 여러가지 기물을 넣는 다목적 용도다.

 

   곡궤(뒤주)

   나락(곡식), 잡곡(, , , 밀 등)

 

 

   2. 궤의 보편성과 개별성

 

   궤는 장롱과 함께 조선시대 목가구 중에서 무게중심에 놓여 있다. 그 아름다움은 균형미 위에 금속으로 기능적인 요소를 입히고 조화롭게 꾸민데서 나온다. 외관만 번듯해서는 오래도록 사랑받지 못하는 법, 간결하고 절제된 형태에다 기능과 실용성이 뛰어나서 누구에게나 사랑받았다.

   궤는 보편성과 더불어 개별성을 지닌다. 어느 하나라도 똑같은 것이 없다고 할 만큼 다양하게 만들어졌다. 우리나라는 그리 넓지 않은 면적임에도 많은 산맥과 강으로 나뉘어져 지방마다 나무종류와 생활양식이 다르다. 운송수단마저 발달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지역 안에서 뛰어난 솜씨를 가진 장인이 궤를 만들면 그 궤는 지역성을 획득하게 된다. 개성적인 모양새를 선보인 궤는 대대로 미의식 · 조형의식이 전승되고 궤 앞에 지역명이 붙어 고유명사화 된다. ‘밀양반닫이’, ‘고창반닫이라 불리는 것처럼. 앞닫이는 전체 형태와 부분의 꾸밈새, 그리고 각종 금속장식에까지 뚜렷한 지역적 특성이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팔도八道로 나뉘어진다.

   궤는 쇠로 된 큼직한 장석들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장석이 베풀어진 정도에 따라 화려하기도 하고 순박한 멋을 지니고 있다.

   앞닫이 궤는 윗닫이 궤와 제작방법 및 장석이 거의 비숫하나 외형에서 쉽게 구별할 수 있는 것은 전체의 균형과 문 활용이 다르다는 점이다. 균형에 있어서 앞닫이는 높이가 높고 폭이 좁다. 장방형에 가까우며 사용자는 앉아서 문을 열 수 있도록 평균 높이가 70cm 내외로 되어 있다. 온돌바닥과 가구 사이의 통풍을 고려하여 다리를 만들어 약간의 높이를 두기도 하였다.

   반면 윗닫이는 사용이 편리하도록 키가 낮고 길게 만들어진 직사각형 꼴이다. 어찌보면 가장 미니멀minimal한 형태이다. 문에 있어서도 앞닫이는 전면 전체의 반보다 작게 열리나 윗닫이는 윗면 전체의 반보다 크게 열린다. 앞닫이는 높지만 반보다 작은 문 구성이 안정감을 준다. 윗닫이는 내부에 넣을 수 있는 용적을 최대로 사용할 수 있도록 충분히 열리는 것이 편리하므로 열리는 문이 크다. 안정감과 한 눈에 식별할 수 있고 꺼냄이 편리한 장점 때문이다.

   사용된 나무는 소나무가 많은데 전국적으로 고루 분포하고 나무의 질이 적당하여 다루기가 좋고 터짐이 덜해서 민가에 애용되었다. 소목장이 만든 것을 보면 무늬가 좋은 느티나무 같은 것은 앞판에, 그 외의 면에는 소나무나 험한 나무를 붙였다. 소목장이 아닐지라도 장석을 구입하여 집에서 만드는 경우도 있었다. 나무를 만지는 그 사람이 디자이너이자 기술자였다. 연장이 발달되지 않았던 산간벽지나 섬 지방에서는 자귀로 다듬어 널 표면에 자국이 보인다. 쓰임새가 다양해서 미리 만들어 두었다가 적절한 때에 사용하기도 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궤는 갈라진 틈 사이로 먼지가 들어오거나 벌레 침입을 막기 위해서 닥종이를 발랐다. 필사한 책을 붙이기도 하고, 글씨 연습을 한 종이, 신문지, 제문祭文을 발라놓은 경우도 있고 부적符籍을 붙여 놓은 경우도 있다.

 

 

   3. 궤의 마음

 

   몸을 한껏 낮춘 궤는 외부의 동요에는 함구하겠다는 듯이 무뚝뚝한 표정이지만 그에 어울리게 끈질긴 인내심을 가졌다. 그러나 궤의 문을 열고 그 속에 무언가를 넣을라치면 궤는 적극적으로 자신에게 들어오는 것을 받아 안는다. 모든 기물은 무엇을 담을 것인가 결정하고 난 뒤 만드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궤는 무엇을 담기 위해 만들었지만 담기는 것이 무엇이건 탓하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그릇과도 같은 속성을 지녔다. 다만 꼭 그 크기만큼만 담을 뿐.

   궤는 가장 단순한 형태를 고수하면서 옹골차게 자신을 드러낸다. 쇠로 갑옷을 두르고 자물쇠로 입마저 채워진 궤를 보면 그 속에 무엇이 있을까 궁금증을 유발시킨다. 앞판에 두 개의 들쇠가 달리고 배꼽에 들쇠가 달린 앞닫이의 형상은 마치 사람이 웃는 모습과 같다. 그 단단한 생김새를 보는 순간, 마당과 집은 울타리고 궤는 속알맹이구나 싶어진다. 희멀쑥하니 허세만 부리는 다른 기구들과 비교가 될까. 부드럽고 따뜻하며 단단한 나무와 차갑고 거무튀튀한 금속성()의 조합만으로 이렇게 쓸모 있는 물건으로 태어나다니.

   누군가의 마음의 집이었을 궤를 쓰다듬어 본다. 속은 텅비어 있어도 나이를 많이 먹은 궤에는 환희와 애달픔의 회로가 깔려 있다. 목숨처럼 간직해 온 것들과 버려야 할 때 버리지 못하고 껴안고 있었던 것들, 품에 안을 수 없으나 안고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것들이 똬리를 틀고 앉아 있다. 문을 열면 낱낱이 보여주지 않은 채 반만 드러낸다. 반쯤은 안으로 삼키고 반쯤만 드러내는 그 은근과 속 깊은!

   궤는 환금성換金性이 형편없거나 공예사적인 측면에서 가치 조차 없어서 관심 밖인 여느 목가구들과는 다르다. 궤는 그 실용적인 가치로 인해서 엔틱샵antique shop에서도 환대받고 있으며 현대 소목장에 의해서 재탄생되고 있다. 사람이 들숨과 날숨을 쉬어야 하는 것처럼, 궤도 열림과 닫힘을 통해서만 존재가치를 부여받을 수 있다. 영원히 들춰지지 않은 채 헌신짝처럼 버려지지 않는다면 그토록 엄전스레 앉아 있을 궤에서 백년일심百年一心을 읽는다.

 

 

 

 

조선후기 경상도 반닫이와 전라도 반닫이의 조형의식

 

정복상
경일대학교 공예과 교수

 

   전통사회에서 생활에 필요한 목공예품을 제작하는 사람들을 흔히 소목장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자신의 제작기술로 각종 생활용품에서부터 건축에 필요한 소도구에 이르기까지 당시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들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존재였다. 우리가 소목장에 관심을 갖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올바른 소목장에 대한 이해는 그들이 살았던 사회적 배경을 떼어놓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소목장의 제작행위는 사회구조 속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에 사회 · 문화 및 미적 맥락 하에서 파악하여야 함은 이를 나위가 없다.

   소목장들이 생계 수단으로 제작한 반닫이도 나름대로의 일정한 미의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 미의식은 조형의식으로 이행하였을 뿐만 아니라, 독자적인 조형의식 및 조형양식을 낳기에 이르렀다. 반닫이를 통해 표출되어진 그 개개의 조형약식은 자연환경, 수요자의 기호, 사용되어지는 재료 등이 잘 조화되어 형성된 조형의식의 반영물인 것이다. 따라서 그것들은 지역별 나름대로 정형화된 조형의식을 낳기에 이르렀는데, 그것은 그것을 만드는 사람들의 잠재된 조형의식과 형태Geastalt의식 등에 의하여 성립된 각각의 미의식을 반영함으로써 탄생하게 된 것이다. 그런 만큼 반닫이에도 지역적 특성이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다. 각 지방마다 오랫동안 전해 내려온 지방마다의 미의식과 각기 전승되어온 전통적 제작방식 및 자연환경 그리고 생활정서에 따른 특징적인 장식성이 반닫이에 그대로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반닫이와 반닫이가 만들어진 시대적 배경의 관계에 있어서 반닫이는 변하지 않았으나, 사회 · 문화의 바탕이 변했을 경우, 반닫이의 의미변화는 그 바탕의 변화와의 관계 속에서만 올바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조형의식에서 지형을 논하는 이유는 지형적 요소에 대한 지각 경험이 우리의 조형의식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우리가 좋아하는 형태 속에 담겨 있는 태도는 중국이나 일본과 비교될 수 없는 자연에 대한 깊은 이해와 사랑을 표현하는 세계를 형성하고 있다. 우리가 기계적인 표현이나 기술적 메카니즘에 친밀감을 느끼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의 의식 속에도 이러한 모든 정신적인 개념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며 공예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조형예술은 정밀하게 인위적으로 다듬어지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꾸밈없는 여유와 꾸밈없으면서도 무언가 더 크고 심오한 것을 담고 있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하겠다. 우리의 조형예술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특징들은 아마도 인간의 편견이나 선입관에 의하여 사물을 꾸미지 않고 또한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겸허한 마음을 바탕으로 하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한 문화 안에서의 미적 가치에 대한 관심은 생활 세계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미적 가치란 미적 관심에 의하여 주목하게 되는 ,일상생활 속에서의 어떤 문화적인 가치 규범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생활 세계의 보편적 구조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생활 세계 자체의 상대적이고 고유한 특성들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통하여 파악되어야만 할 것이다. 또한 그것은 그 문화권의 구성원을 이루는 사람들 사이에서 공통적으로 인정되는, 하나의 삶과 사회에 대한 가치의 전형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조선후기 경상도 반닫이와 전라도 반닫이를 분석한 결과 조선시대의 목가구 중 특히 반닫이는 경상도와 전라도라는 행정구역상으로 구분되는 조형성의 차이보다도, 지리적 환경 구분의 내륙지방, 평야지방, 해안지방의 조형성의 차이가 확연히 드러나 보였다.

 

   내륙지역(진주, 밀양, 양산, 전주, 익산, 남원, 완주)의 특징은 평야지역과 해안지역에 비하여 금구장석에 투각이 많이 행하여져, 화려하면서도 장식적인 면을 중시하여 장석의 크기는 반닫이의 면적과 비교해보면 대체로 적절한 비례와 안정감을 이루고 있다. 이는 내륙지방이 배산임수의 주거환경과 기암괴석으로 둘러싸인 천혜의 조형미와 조화를 이루려는 미의식이 반닫이에 자연스레 반영된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내륙지역의 조형의식을 추상화된 개념의 관점으로 본질을 규명한다는 담백함으로 정리된다.

 

   「담백함의 조형의식

   전통적으로 우리는 규모보다는 균형을 중시해왔다. 다시 말해서 규모가 작더라도 균형이 유지되고 있는 체계를 더 높이 평가해 왔다는 사실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경제적 여력이 없다면 그 현실을 이기는 힘, 즉 그에 대응해서 균형을 유지하기 위하여 우리의 자아의 힘도 한층 더 강화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곧 담백함, 즉 욕심이 없고 깨끗한 심리 상태로서,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이야 어떻든 마음의 내적 체계의 균형을 지켜 나가는 의식과 태도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외부적 조건에서도 우리 자신의 생활과 문화에 대한 자아의 통제력을 잃지 않고 담백한 삶을 살아 왔으며, 그것이 곧 우리 조형 의식의 근간을 이루게 된 것도 당연한 일이라고 하겠다.

   생활 속에 존재하는 모든 도구들의 의미 체계 즉 의식주를 위해 만들어져 온 조형적 대상뿐만 아니라, 비조형적인 것들까지도 역시 담백함이 의식의 기반이 되는 사상이며, 선비정신의 기저를 이루는 표상적 개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담백함의 조형 의식이란 여러 관념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겉보기에는 약하고 무미한 것처럼 보여 질 수 있다. 그러나 담백함은 단순성, 간결성 등과 같은 일반적 개념과 구별되는 감각이다. 예를 들어 simplisity라는 개념은 일종의 추상적 수준의 개념으로서 어떤 명료함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만, 담백함이란 그와는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조선후기 내륙지방 반닫이의 형태와 구조, 금구장석을 보면 이러한 담백함이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우리는 흔히 반닫이의 모습에서 간단한 가구라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왜냐하면 반닫이는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가장 완벽한 균형과 간결하고 담백한 상태를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균형 상태는 어디까지나 내적인 차원에서의 균형이며, 외적으로는 단수하고, 소박한 6면이 판재로만 구성된 입방체로 불명확한 느낌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갖게 하는 것이다.

 

   그에 비해 평야지역(김해, 나주, 광주, 영광, 정읍, 고창)의 특징은 금구장석이 간결하고 필요이상의 사용을 피하여 목리와 조흔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이처럼 평야지방 반닫이는 전면에 분포되어 있는 금구장석이 차지하는 비율이 내륙지방이나 해안지방에 비하여 많이 적어 장식을 간소화한 특징을 보이고 있다. 그것은 비교적 산세가 평탄하고 너른 평야가 펼쳐져 있는 지리적 환경의 영향을 받아 답답하게 많은 장식을 기피하는 미의식이 반닫이에 자연스레 반영된 결과로 추정된다. 따라서 평야지방의 조형의식을 추상화된 개념의 관점으로 본질을 규명한다면 탈기교와 허로 정리되어진다.

 

   「탈기교와 허의 조형의식

   결이 삭혀진 맛은 곧 곰삭은 맛이다. 그것은 오랜 세원 동안의 발효 과정을 통하여 우러나오는 맛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맛은 부드럽고 순박하여 구수한 인간적인 맛이기 때문에, 산뜻한 맛이나 가벼운 밧, 기교적인 맛의 세계와는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다.

   조형 예술에 있어서 부드럽고 순박하고 구수한 맛이란 곧 탈기교의 맛이다. 감각적인 관점으로 볼 때에는 탈기교적인 예술은 기교적인 예술보다 약한 것으로 보여질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탈기교의 맛은 기교적인 맛보다 현시성이 약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탈기교적인 맛의 예술은 기교적인 예술에 비해서 인간의 눈을 현혹하지 않는다. 겸손의 미덕이 약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약한 것이 아니듯이, 우리의 조형 예술은 결코 약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올바로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이와 같이 조선후기 평야지방 반닫이는 은근하면서도 깊은 속맛을 주조로 하고 있다. 이처럼 조선후기 평야지방 반닫이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려고 노력하지 않는 대신 스스로의 내면적 아름다움에 더 치중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빈 데 없이 꽉 채워 놓아야만 직성이 풀리고 가까이 다가가 세밀하게 그 미시적 특징을 관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입장에 비하여, 적당히 비워 놓고 일정한 거리를 견지하면서 거시적으로 전체적 특징을 살피는 우리의 인간적 자세는 하나의 멋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시각적인 기교를 넘어 어떤 심리적인 멋까지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작품 자체만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의 심리적 상태까지 그 조형 체계 속에 감싸 안음으로써 궁극적으로 예술을 통하여 인간과 자연의 본질에 좀 더 가까이 가려는 이러한 태도는, 조선후기 평야지방 반닫이의 가장 큰 특징의 하나라고 하겠다.

   허는 실의 반대되는 말로 부족한 것, 곧 약한 부분을 드러내는 틈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에 있어서 이 말은 그렇게 부정적으로만 쓰이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우리의 겸허 사상을 가만히 살펴보자. 겸허란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어 교만한 기색이 없는 것으로, 자연에 대한 인간의 무력함과 자신의 무지와 한계에 대하여 깊이 자각함으로써 자연의 순리에 순종하는 마음 상태를 뜻한다. 따라서 교만할 수 있을 만큼 풍부한 지식과 높은 덕이 있는 사람이나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 또는 많은 재물을 소유한 사람이 이러한 겸허한 모습을 보일 때, 오히려 우리는 상대적으로 더욱더 채워져 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조선후기 평야지방 사람들의 의식은 곧 탈기교와 허의 조형의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어떤 조형물에는 그것을 만든 사람의 행위와 그 결과로서의 형태가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그 행위와 결과는 이형 동질로서 하나의 존재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하나의 존재로서의 조형물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형태와 행위를 함께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며, 이 때 우리는 형태가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그 행위와 결과는 이형 동질로서 하나의 존재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하나의 존재로서의 조형물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형태와 행위를 함께 받아들이지 않으며 안 되며, 이 때 우리는 형태를 통하여 행위에 접근하게 된다. 우리는 이미 오래 전부터 이러한 조형원리, 또는 더 나아가 자연의 원리를 깨닫고 있었기 때문에, 서구와는 달리 탈기교와 허를 바탕으로 우리의 조형 예술을 형성시켜 왔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탈기교와 허의 조형의식이란 자연의 원리와 인간성의 한계에 대응하는 가장 지혜로운 창조의 원리가 아닌가 생각된다.

 

   또한 해안 지역(충무, 남해, 목포, 해남, 장흥, 여수, 광양, 순천)의 특징은 금속장식이 한국장식문양 특유의 아름다운 곡선을 균형 있게 표현하였으며 매우 소박하면서도 간결하고 투박한 느낌이 강하며, 재치 있는 조형미를 나타내고 있다. 이는 해안지방의 굴곡이 많은 해안선과 많은 섬을 배경으로 생활하는 이 지역 주민들의 미의식이 생활 공예품인 반닫이의 의장에 오랜 시간 동안 투영되어 둥글둥글한 불로초 제비초리형과 쌍 버선코 모양의 금구장석으로 표현된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해안지방의 조형의식을 추상화된 개념의 관점으로 본질을 규명한다면 둥근 형태의 조형의식으로 정리되어진다.

 

   「둥근 형태의 조형의식

   모서리가 날카로운 기하학적 형태는 모서리가 둥근 형태보다 강하게 느껴지게 마련이다. 일반적으로 둥글둥글한 형태는 비자극적이고 주위를 끄는 힘이 부족하기 때문에, 힘이 없거나 개성이 약해 보이게 된다. 그러나 곡선적인 형태가 겉으로 보는 것처럼 그렇게 약한 것만은 아니다.

   조약돌과 같은 비정형적인 둥근 형태들은 오랜 세월 속에서 깎이고 다듬어지는 과정을 통하여 만들어 졌다는 점에서 곧 시김의 형태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운동감보다는 어떤 내재적인 생명감을 자신의 본질적 요소 중의 하나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이렇게 볼 때 둥근 형태란 우리가 추구해야할 인간의 형태, 또는 조형 예술의 형태와 이형 동질임을 알 수 있겠다.

   해안지방의 자유곡선인 해안선의 형태와 조약돌의 형태들이 그대로 조선후기 해안지방 반닫이의 금구장석 형태에 반영되고 있다. 해안지방 사람들의 조형 의식이 긴장을 싫어하고 겉모습에 현혹되지 않으면서 자연의 원리에 순응하는 경향을 갖게 된 것도 그 영향이며, 그러한 경향이 곧 궁근 형태를 창조하도록 영향을 미친 것이다. 따라서 해안지방 사람들이 직선적인 것보단느 곡선적인 것을 좋아하고 눈에 띄는 것보다는 숨겨져 있는 것을 선호하며 겉으로 드러나는 운동감보다는 속에 내재하는 생명력을 중요시하게 된 것도 당연한 일이라고 하겠다.

   따라서 둥근 형태는 지적이고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분석을 거부하며, 그럼으로써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긴장을 풀고 편안한 마음을 갖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이 아마도 보는 관점에 따라서는 그것이 몰개성적인 것으로 비쳐지는 이유가 아닌가 생각된다.

   우리는 예로부터 논리적 구분이나 작위적 기교를 무시해 왔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조형 예술은 어떤 외적 체계에 의존하지 않고서도 자신의 내적 균형을 스스로 유지할 수 있는 힘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난 것이 갈고 닦여 둥글게 되는 것을 자연의 순리라고 한다면, 우리의 둥근 형태는 곧 자연에 순응하는 형태라고 말 할 수 있겠다. 외면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사실은 내면적인 힘과 개성을 가진 강하고 아름다운 형태인 것이다.

   그러므로 조선후기 해안지방 사람들의 조형 의식은 곧 둥근 형태의 조형 의식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것은 지형의 영향이 많은 작용을 한 것으로 판단된다.

 

   하나의 문화적 산물 속에 담겨져 있는 사상은 모두 일련의 형식으로 범주화 · 집단화된 동질적 구조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는 인간이 특별한 기억들을 저장하고 있으며, 이 기억들이 인간의 행위, 사고에 영향을 미침으로써 성립된 것이다. 조형 예술가들이 어떤 것을 기억해 두었다가 그것을 자신의 방식으로 표현하려 사고를 하고, 사실에 기초한 사실적 기억의 상보적 관계의 산물을 제작할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작가나 장인이 조형물을 구상하고 제작함에 있어 조형의식을 형성하는 요소는 자신이 자라온 지역적 환경, 생활하면서 경험하고 체험해온 모든 것, 또한 사회적인 교육을 통해서 축적된 지식들을 능동적으로 선택함으로써 조형물의 표출에 절대적인 영향을 주는 조형의식이 성립됨을 알 수 있다. , 작가나 장인들의 조형의식이 자연 · 지리적 환경, 경험과 학습, 고착된 기억 등이 선택적 · 의식적 형상화 과정을 거쳐 조형물에 반영 및 표출되어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소목장들의 조형의식의 고찰과 반닫이의 특성은 현식적으로 경상도 반닫이와 전라도 반닫이는 가로 평균길이는 93cm95cm이며, 평균 높이는 58cm70cm이고, 평균 깊이는 44cm로 동일하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면 윤곽비는 경상도 반닫이가 1 : 1. 60으로 황금비(1 : 1. 618)에 가깝고, 전라도 반닫이는 1 : 1. 36으로 자승근비(1 : 1. 24)에 가까운 것으로 파악되었으며, 두 지역의 체적비는 1 : 1. 24로 전라도 반닫이의 비율이 높았다. 그것은 전라도가 평야가 많아 경상도 보다 부의 축적과 생활의 풍요 등이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였다.

   따라서 경상도 반닫이는 전라도 반닫이에 비하여 높이가 제법 낮고 가로길이는 조금 짧으며, 장석의 수가 많아 화사한 분위기를 연출하여 안방용에 적합하게 구성되어있는 반면, 전라도 반닫이는 경상도 반닫이에 비해 높이는 제법 높고, 가로와 깊이는 그와 비숫하며, 필요 이상의 장식을 하지 않아 목재가 차지하는 면적을 넓게 하여 아름다운 목리가 잘 드러나도록 표현하여 사대부의 기질과 사랑방용에 적합하게 구성된 것이 특징이다.

   반닫이의 전체 형식에 비해 금구장석의 형태와 수량은 다음과 같은 지역적 특색을 드러내고 있다. 전라도 지역은 그 형식이 단순하고 수적으로도 많지 않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경상도의 반닫이는 화려하고 복잡한 형태를 이루고 수량도 많다는 것이다. 또한, 반닫이 제작에 사용된 목재는 두 지역이 비슷하게 나타났으나 소나무의 사용이 경상도(68.5%)가 전라도(61.7%)보다 다소 많았으며, 느티나무의 사용은 전라도(33.3%)가 경상도(29.0%)보다 다소 많게 조사되었다.

   이와 같이 조선후기 경상도와 전라도 반닫이의 조형성 비교를 통하여 반닫이는 우리의 생활과 밀접하게 관련을 맺으면서 지역의 환경, 풍토, 문화, 장인들의 개성에 따라 지역별로 특성 있는 조형 의식에 의해 발전된 생활공예품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우리 조상들이 반닫이에 자신들의 조형 의식을 표출하면서 나름대로 일정한 조형 측도와 자연미를 중시하려는 장인정신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또한 반닫이가 지닌 조형미의 지역적인 차별성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는 하나로 귀결할 수 있는 우리네의 조형의식이 내재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조선시대의 못

-궤를 중심으로-

 

정대영

 

   우리 생활 속에서 매우 밀접하게 볼 수 있는 못은 본래 으로도 표기되었으며, 한문 표기인 정으로 더 많이 쓰였다. 조선의 가구는 제작 전에 그 기물에 가장 적합한 못을 제작하여 사용한다. 결속 방법에 있어서 나무와 나무끼리의 결속이 가장 우선이지만 나무끼리의 결속이 불가능할 때는 못을 이용한다. 그러나 완성된 가구나 기물의 겉면으로 못이 드러나거나, 다른 재료와의 조화를 이뤄야 할 때 그리고 장석과 함께 쓰일 때는 못머리釘頭에 치중해 제작했다. 이때는 실리 뿐 아니라 미적 감각까지 표현하여 못을 만들었던 것이다.

   특히 못은 기물이 완성된 후에도 계속 기물 속에 남아있게 되므로 더우 그러하다. 따라서 적합한 자리를 잘 따져서 못을 박아야 한다. 못이 나무 속에 묻혀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고려해야 하며, 쉽게 못을 박는 것도 삼가야 한다. 바로 이런 이유로 고가구나 고건축에서는 못을 쓰지 않고 작했다라고 한다. 못의 사용을 절제했으며, 박아도 실리를 높일 곳에만 신중하게 적용했기 때문이다.

 

   나무와 못

   나무에는 저마다 다른 조직(본질)과 나이테(목리)가 있는데, 같은 종의 나무라도 성장과정, 기후, 토질, 위치 등에 따라 성질木性이 다르다. 따라서 나무를 가구 및 기물의 재료로 사용할 때는 그 성질에 따라 잘 배치하고 적용해야만 한다. 기물을 완성한 후 사용과정에서 나무가 휘거나 터지는 등의 문제점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널과 널을 결속하여 궤를 제작할 때 각 모서리의 결속은 서로 응결하려는 힘의 방향을 안쪽으로 가도록 해야 한다. 힘의 방향이 모여지면 결속이 단단해져 한계치 힘을 차단해 주기 때문에 뒤틀림을 방지할 수 있지만 두서없이 배치 결속하면 궤가 완성된 상태에서 뒤틀림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결속하지 않고 붙여주어야 하는 부분인 궤의 상판과 문판의 경우도 같은 논리가 적용된다. 특히 문판의 경우 휘는 방향을 앞으로 가도록 배치해 나무조직의 변화가 이루어지면, 문을 닫았을 때 딱 맞지 않고 벌어져 제 역할을 못하는 것은 물론, 보기에도 좋지 않다. 때문에 변화의 가능성을 예측하여 안쪽으로 휨의 방향이 가도록 하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이 된다.

 

   못의 재료

조선의 목가구에서는 형태 구성 시 대나무와 나무로 만든 못이 선호되었지만 궤에서는 내구성이나 모양 변화의 장점 때문에 철재료의 못도 많이 사용되었다. 특히 나무 재질의 특성상 휘거나 구부릴 수 없는 한계 때문에 용도에 따라 필요한 경우 또는 사용의 편리함 때문에 변형이 가능한 금속재질의 못이 많이 활용되었다.

 

   1. 나무

   ⊙ 죽정-대나무로 만든 못

   가구 제작에서 사개결속이 가장 기본적인 제작법이지만, 얇은 나무의 결속은 대나무 못만으로도 충분히 유지할 수 있으므로 보편적으로는 대나무 못만으로도 충분히 유지할 수 있으므로 보편적으로는 대나무 못을 사용하였다. 대나무가 탄력성이 있으며 질긴 점과 못으로 만들기 쉽고 재료 확보가 쉬운 점이기 때문이다. , 대나무 못을 제작할 때는 대나무에 매듭이 없는 부분을 쪼개어 사용하였다.

돌출되는 못머리는 잘라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표면과 밀착되며, 못 머리가 박힐 때 만약 흠집이 생겨도 머리를 제거해 다시 매끈한 모양을 갖출 수 있다. 또한 잘라낸 나머지 부분은 다시 활용할 수도 있다는 것도 가장 큰 장점이다. 특히 그 각진 모서리가 못의 회전을 방지하므로 고정에 안정적인 좋은 매개체이다.

죽정은 빼닫이에서 많이 볼 수 있는데, 빼닫이 죽정은 근대의 것과 나누는 척도가 되기도 한다. , 조선시대의 것인지 근대의 것인가를 확인하는데 빼닫이 못이 기본이 되는 것이다.

 

   ⊙ 목정-나무로 만든 못

   두꺼운 판재에는 주로 나무못을 사용하였으며 대나무를 구하기 어려운 지역에서도 주로 사용하였다. 모든 나무들을 나무못으로 활용할 수 있었지만 기물과 재료에 따라, 딱딱하고 탄력있으며 조직이 질긴 나무를 못으로 사용함은 당연하다 하겠다.

   나무못을 대상에 박을 때는 먼저 들어갈 곳을 뚫은 후 그 자리에 박아 넣는다. 나무못은 굵기를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기 때문에 굵은 굵기로 만들어 육중한 대상이나 그에 적합한 입지에 주로 사용하였다. 못머리는 면에 맞추어 제거하는데, 머리 부분을 바짝 자르지 않고 조금 남겨 자른 후 면에 맞추어 평평하게 되도록 박아 넣고 대패로 다듬질해서 마무리한다.

   궤의 사개결속 후 나머지 부분을 붙임으로써 완성할 때는 나무못을 선호하였다. 이는 나무끼리의 결속을 우선하는 논리에 의해 나무못을 만들어 사용한 것과 그 결속과 같은 형태의 붙임을 해야 할 재료가 두껍기 때문이다.

 

   2. 금속

   ⊙ 철정 철로 만든 못

   철이 발견된 이후 지금까지 일반적인 못의 가장 대표적인 재료이다. 철은 가열, 두들김, 담금질(냉각) 등을 통해 다른 결과물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 동정 동 합금 재료로 만든 못

   철 다음으로 많이 사용되었다. 이들 금속은 서로 배합 비율에 따라 그 강도와 색감이 달라진다.


 

 

형태로 본 못의 종류

 

   1. 못머리의 형태 변화

   ⊙ 무두정 머리가 없는 못

   처음부터 머리가 없는 형태로 제작되는 철, 동 등의 금속 재료를 통상적으로 머리 없는 철정 또는 무두정이라 일컫는다.

 

   ⊙ 곡정 머리가 꺽인 못

   무두정에 비해 조여주는 힘을 더 갖춘 못으로 무두정과 같이 못머리가 표출되지 않고 묻히도록 박아 가구의 표면과 일치되도록 쓴다. 곡정의 모양 변화는 머리끝을 끊어낼 때 절단 방향과 꺾는 방법, 두들겨 다듬은 후의 처리에 따라 각기 다른 모양을 갖추게 된다.

 

   ⊙ 광두정 머리가 확장된 못

   머리 모양을 넓고 크게 만든 못을 광두정이라 한다. 못머리를 두들겨 크게 확장해야 하므로 제작 과정에서 많은 두들김이 소요된다. 이때 못머리와 못의 본체가 연결되어 제작되므로 본체가 머리 뒷면의 정 중앙에 위치하지 않기도 한다. 못이 박힌 자국이나 가구의 흠집 등을 가리거나 들쇠와 문고리 밑에 대어 금속과의 마찰로 가구에 흠집이 생기는 것을 방지하고 충격을 완충하는 용도 또는 소기물의 굽으로 사용되었다.

 

   ⊙ 고리못 머리가 고리 모양인 못

   머리를 두들겨 동그란 고리 모양으로 만든다. 이 고리에 다시 고리를 달아 문고리로 혹은 경첩으로 사용하는 등 실리적으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매우 견실한 고정체로 고정하고, 그 고리에 들쇠고리를 연결하여 요긴하게 쓰였다.

 

   ⊙ 꺾쇠, 거멀못 머리가 긴 모양의 못

   꺾쇠의 양 끝을 자 모양으로 꺾어 구부리고 그 끝을 날카롭게 다듬은 쇠토막을 말한다. 이때 양끝이 기물 속으로 박히고 가운데 부분이 표면에 보이는 머리가 된다. 꺾쇠를 박아 넣은 후 머리는 자로만 보인다. 또 나무 그릇이나 가구 따위의 벌어지거나 금 간 데에 거멀장처럼 걸쳐 박는 못을 거멀못이라 지칭한다. 그러나 이름은 다르지만 둘 다 같은 모양을 지니며 역할도 동일하게 혼용하여 지칭한다. 궤에서 모서리 두면을 강하게 연결해 거머쥐어 주는데 쓰였다. 꺾쇠는 용도에 따라 크기, 굵기, 길이가 각각 다르다.

 

   연결 역할의 꺾쇠

   연결매개역할의 촉과 같은 목적으로 쓰이는 꺾쇠가 있다. 면과 면을 평으로 이어 붙이는 경우에 쓰이는 촉이 이에 해당한다. 독립된 다른 재료들을 하나로 이어 붙여주는 방법으로 이음나무 촉과 꺾쇠는 목적은 같으나 주어진 상황, 또는 기물에 따라 더 적절한 방법을 선택한다. 한 재료 내에서 터짐이 생겼을 때, 그 틈이 더 발전되지 못하도록 억제하는 역할로 꺾쇠를 사용한다.

 

   결속 후 견고성 유지를 위한 꺾쇠

   두꺼운 널판으로만 구성된 육면체의 궤는 육중하기 때문에 보강장치가 필요하다. 이에 문판 부분을 제외한 각 모서리 부분에 꺾쇠를 박아 견고성을 보강했다. 이처럼 궤에서 많이 쓰인 꺾쇠는 널과 널의 사개를 결속한 후 완성된 모서리 부분에 사용해 견고성을 보강하는 장석으로서의 역할을 지녔다.

   궤에 있어서 꺾쇠를 거멀못(거멀쇠)이라고도 하는데, 꺾쇠가 형태의 표현이라면 거멀못은 역할의 뜻을 가진 목적의 못이다.

   궤에 있어서 보강장석으로 꺾쇠는 일반적 개념의 꺾쇠에서 중간부분을 90도로 구부려 쓴 것이다. 궤에 쓰인 꺾쇠 중 하나는 촉 그대로 쓰고, 다른 하나는 독립된 못을 박아 사용(단촉꺾쇠)한 것이 있고, 양촉을 다 못으로 박은 모양(꺽쇠라 볼 수 있음)이 있다. 후자 모양이 후대로 오면서 실용에 더 많이 적용되었다.

   그런데 꺽쇠 사용시 특히 작은 기물 혹은 주석 재료일 때는 못을 따로 사용했다. 즉 꺾쇠가 정석의 역할을 하고 꺾쇠를 고정하기 위해 못이 쓰이게 된 것이다. 이 때는 못머리가 보이지 않도록 구멍을 뚫어 못을 박아 넣고 표면을 매끈하게 정리했는데, 꺾쇠와 같은 재료로 못을 만든다. 이는 궤의 견고성을 강화하는 동시에 치장 역할도 겸한 것이다. 넓적한 평철로 자로 굽은 곡형에 따로 못을 박는 경우도 있다. 이는 꺾쇠와 똑같은 목적으로 사용되지만 감잡이라 한다.

 

   바른 균형을 잡기 위한 꺾쇠

   주로 무거운 그릇을 수납하고 곡식을 보관하는 찬장이나 뒤주, 곡궤穀櫃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사개결속을 했다 하더라도 그 무게로 인해 본체에 무리를 주기 때문에 사용 중에 흔들린다거나 균형이 비틀어지게 되는 경우가 생긴다. 이때 흔들림 없이 고정해 주기위해 수직골주와 수평골주가 만나는 삼각위치에 이 꺾쇠를 박아 가구의 바른 균형유지를 했던 것이다.

   이런 역할의 꺾쇠는 쓰일 대상의 재질과 위치에 따라 적합한 굵기 설정이 가장 중요하다. 또 제 역할을 다 하도록 꺾쇠가 완전히 들어박혀야 하지만 배면까지 완전 통과하지 않는다. 기둥 혹은 기둥과 같은 굵은 골주에 쓰이기 때문에 입수될 촉은 짧고 굵은 편이다. 이처럼 바른 균형을 위해 꺽쇠를 사용할 때는 연결이나 보강의 기능으로 쓰일 때와는 달리 실제 사용에서의 역할에 더 비중을 둔다.

 

   확실한 경첩 고정을 위한 꺽쇠

   꺾쇠는 경첩을 고정하는 못의 역할로도 사용되었다. 문을 열어 뒤로 젖힐 때 가장 큰 힘을 받는 경첩의 굵기가 지렛대 역할을 해 본체와 문(뚜껑)이 서로 분리되는 힘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때는 작은 힘일지라도 문이 젖혀지면서 경첩에 무리가 쉽게 가해지므로 못 보다는 꺾쇠로 경첩을 고정하는 편이 더 견고하고 안정적인 방법이다.

   이 경우 경첩에 못을 박기 위한 두 구멍 위치에 꺾쇠 하나를 꿰맨 것처럼 박아 안쪽으로 감아 구부려서 경첩을 가구에 부착하는 것이다. 이는 마치 장석(모든 장석은 못으로 고정시킨다)의 일부인 것처럼 구멍을 끼워 꿰맨 것 같이 고정시켜 주는 방법으로 못보다 더 강력한 고정방법이다. 여기서 사용된 꺾쇠는 입수 촉이 길며 촉을 완전히 통과시켜 배면, 즉 가구 안쪽에서 다시 구부린다. 이는 사용자의 경험에 의해 보강된 방법으로 힘의 작용점에서 가까운 곳에 못 대신 꺾쇠로 고정한 것이다.

 

   족임잘못 머리가 양 끝에 있는 못

   형태면에서 볼 때 끝이 없고 양끝이 뭉뚝하여 머리가 두 개의 형태의 못이다. 대상체에 박아 넣는다는 개념보다는 결속시켜주는 매개체의 성격이 더 강하며, 경첩같은 금속결합 부분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2. 못 끝부분의 형태 변화

   ⊙ 일반못 - 끝이 하나인 못

   ⊙ 짜개못 - 끝이 둘인 못

   ⊙ 꺾쇠 - 끝이 둘이지만 간격이 있는 못

 

 

   못의 다양한 역할

 

   1. 붙임-기본적인 고정의 역할

   일반적으로 궤를 제작할 때 사개결속 외 못을 사용하여 면을 붙이며 이러한 붙임에 사용되는 못은 나무, 대나무, 철 등 다양한 재료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많이 쓰인 형태의 못은 무두못과 머리가 자로 꺾인 철재못 등이 주로 사용되었다.

 

   2. 치장-완성도를 높이는 장식적 효과

   전통가구는 나무로 기물을 완성한 후에 금속장석을 부착하게 된다. 이 장석은 문을 여닫게 하거나 잠금을 가능하게 하는 등의 고유한 기능과 더불어 외관상으로도 보기 좋은 미적도안으로 가구의 예술적 완성도를 한층 배가시키는 역할을 했다. , 본래의 기능성을 기본적인 전제로 갖추었음은 물론이다.

   이러한 장석을 제작할 때는 못 머리까지도 사전에 고려해서 제작하였다. 이때 장석에 사용되는 못은 대개 장석과 같은 재료로 만드는데, 만약 철로 장석을 만들면 못도 철로 만들고 황동이나 백동으로 장석을 만들면 못 역시 같은 재료로 제작하였다. 따라서 이때 사용되는 못은 머리 모양 자체가 장식성을 포함하고 있다. 장석과 함께 장석 부품으로 쓰인 못은 못머리가 없는 못과 두들긴 각이 보이는 모양의 못머리, 모가 없는 둥근 모양들이 대표적으로 쓰였다. 또한 특정한 모양의 못이라 할지라도 쓰일 곳에 따라 기물과 장석의 상호 적합성에 따라 합법적으로 쓰였다. 예를 들면 고리받침에 못머리가 높이 솟아나게 하는 경우들이 그렇다.

   이 외에 장석의 고정 및 보조적인 역할이 아니라 독립적으로 장식 목적을 지니는 못도 있다. 못 머리에 음각세공(은상감)을 넣거나 의도된 도안을 은입사한 광두정이 바로 장식적인 성향의 못이다.

 

   ⊙ 원두정-둥근 머리 못

   ⊙ 광두정-넓은 머리 못

   못 머리의 둥근 단면이 평범한 일반 원두정보다 훨씬 큰 못머리를 광두정으로 구분한다. 이 못은 넓적하고 큰 못머리를 특별히 쓰고자 하는 의도로 제작된 것이다. 못을 제작할 때 머리부분을 미리 높게 설정하고, 넓적하게 많이 두들겨 크게 확장시키면 광두정이 된다. 이때 머리의 크기와 모양은 여러 가지로 나타나는데, 머리의 크기는 못 굵기와 직결된다. 못이 굵을수록 머리를 넓게 퍼뜨려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한 힘을 요하는 건축 부분에 쓰이는 못이라면 굵을 수 있지만, 가구에서 굵은 못은 파괴에 가까울 정도로 큰 부담을 주게 된다.

   때문에 가구 속에 쓰일 광두정은 가는 굵기의 몸통에 넓은 못 머리의 형태가 필요하다. 그런데 굵기는 가늘고 머리만 넓게 만들기 위해서는 두들겨야 하는 수공이 더 많이 필요하다. 바로 이런 경우에 능률적인 방법은 머리를 따로 만들어 못과 결합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결합은 땜질을 하는 경우와 넓은 머리와 무두못을 땜을 하지 않고 꼭 끼게 결합시키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그러나 이들 방법은 모두 한금속체를 두들기고 늘려 만든 광두정보다는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보다 섬세한 결합 기술이 필요하다.

   광두정을 만드는 또 다른 방법도 있다. 그것은 바로 두 개의 독립체로 머리는 넓게 두들겨 구멍을 뚫고, 일반 못을 그 구멍에 끼워 마치 장석에 못을 끼우는 형태와 동일한 방법으로 광두정을 만드는 것이다. 다량을 요하는 시기에 효율적인 방법으로 발전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다양한 모양의 광두정

   광두정의 모양은 매우 다양하다. 반구 모양(측단면에서 볼 때 반원), 완만한 반구, 볼록한 모양, 반듯한 직각체 모양 등이 있으며 외형은 직각체 모양인데 안은 비어있는 것으로 둘레를 각진 모양으로 꺾어 만든 것도 있다. 이처럼 다양한 모양의 광두정이 만들어진 까닭은 쓰일 곳에 따라 최소한의 기능성을 두고 만들기 때문이다.

 

   광두정의 역할

   광두정은 궤에 많이 쓰였는데, 그 중에서도 문판과 들쇠고리 부분에 많이 사용되었다. 궤의 문판을 만들 때는 문판의 배면, 즉 뒷면에 긴각목을 가로질러 박는다. 이 뒷면에 댄 각목은 문판을 정위치로 닫히게 하고 문판이 휘는 것을 방지하고 균형을 바르게 유지시킨다. 또 경첩이 파손된 경우에는 잠금장치를 유지할 수 있는 기능을 하므로 반드시 붙인다. 이때 배면에 각목을 막을 때 쓰인 못 끝이 앞면으로 튀어나오거나 표시가 나더라도 그것을 가려서 덮어주고 재고정해주며 장식적인 역할까지 해주는 것을 궤에서 쓰인 광두정의 역할로 치중하였지만, 보이지 않는 배면증가의 상쇄역할도 하고 있다.

   그런데 못이 박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나무 표면이 증가하고 휘는 증상이 생기는 이 배면의 못과 앞면의 광두정은 서로 일치되지 않는 위치에 박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는 광두정은 미적 장식의 역할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광두정은 받침쇠와 함께 쓰인 경우가 많다. 여기서 받침쇠는 미장효과도 크지만 가구 표면과 광두정 사이의 틈을 중이면서 밀착에 더 효과적인 역할을 한다. , 못머리가 위로 볼록 솟아 나무의 표면과 못머리 사이에 빈 공간이 있는 광두의 경우에도 받침쇠를 통해 못의 본체를 붙들어주어 전체적으로 밀착하게 만드는 효과를 내는 것이다.

 

   ⊙ 광두차정-머리에 치중된 못

   광두차정은 처음부터 장식적인 역할의 미장을 염두에 두어 못머리에 보다 큰 비중을 두고 제작한 못이다. 주로 못머리가 원기둥이나 사각기둥 형태를 갖췄거나 은입사 된 못 등이 바로 못머리에 특별히 치중된 못들이다.

   이처럼 머리에 치중된 못들은 주로 궤에서는 다양하게 쓰인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궤에서는 문을 열 때 문판에 달려 문을 여닫을 수 있는 반달모양의 손잡이 들쇠와 궤의 양측 면에 부착되어 궤를 들기 위한 들쇠와 궤의 본체 정면 중앙에 치장된 것들이 있다. 이들 들쇠에 못과 받침쇠를 쓸 때는 미장에 치중한다. 그 중 본체 정면중앙에 쓰여진 들쇠고리의 받침부분을 중요시 한다. 이때의 받침 못은 고리와 나무 사이의 완충, 충격에 따른 기물과 경첩의 보호 역할을 하는 것과 더불어 고리를 잡을 때 쉽게 손가락이 들어갈 수 있는 여백을 주는 역할도 했다.

   이렇게 머리에 치중된 못 중 일부는 입수촉 하나를 반으로 나눠 끝이 둘이 되도록 갈라지게 만들기도 한다. 판재를 뚫고 나온 배면에서 서로 반대 방향으로 구부려 고정하기 위해서이다. 이런 못을 짜개못이라고 하며, 광두차정이라고도 한다. 이 위치에 고리를 쓰지 않고 독립된 받침대만 쓰는 경우가 있는데 도안된 장식인 평철모양을 배꼽장석이라 한다. 본체 정면 중앙에 쓰여진 받침쇠로 들쇠고리에 중독되지 않는다.

 

   3. 실리實利-실용적인 효과를 의도함

   못은 붙임과 치장의 기능 외에 실리를 목적으로 만든 못도 있다. 못의 실리기능이란 일반적인 기능과는 다른 목적으로 못이 사용되는 경우를 말한다.

주로 둥근 고리로 된 못머리에서 그 실리적인 역할을 찾을 수 있으며, 같은 목적으로 배목을 쓰기도 하는데 실용적인 측면에서는 장단점이 있다.

 

   ⊙ 고리못

   실리를 표현한 위치에서는 실리쪽으로 편중된 것이 고리못이다.

   ⊙ 들쇠 고리 고정을 위한 고리못

   ⊙ 경첩 역할의 고리 고정을 위한 고리못

   ⊙ 배목

 

   결구-다른 분류에 속하나 못의 역할을 하는 못

   목재가구를 제작할 때 밀착결속은 가구의 견고함과 오랜 수명, 그리고 바른 유지를 위해 매우 중요하다. 이는 가구의 실용성과 내구성으로 직결되기 때문이다. 가장 이상적인 말착결속은 사개결속 같은 나무와 나무의 결속이지만, 그것만으로 가구를 완성할 수 없을 때는 못을 사용하여 결속을 완성하였다.

   그런데 결속의 한 방법인 쐐기를 촉은 일반적인 못은 아니지만 못과 같은 역할을 한다. 때문에 일반 건축에서도 결속을 위한 산지못과 쐐기를, 방두산지는 촉을 의미하고 있다. 특히 가구를 만들기 위해 어느 한 부분을 파내는 입체구성에서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방법이다.

   가구에서 파낸 부분은 그만큼 자연적으로 약해지기 마련이다. 이때 쐐기나 촉의 틈으로 인해 약해진 공간을 꽉 메워 줌으로써 파내지 않았을 때와 가깝게 견고함을 회복시킨다. 이러한 일부분의 결속작업은 원래 지탱하고자 하는 힘을 거의 원상태에 가깝게 회복시켜 주며, 그 결과 가구가 매우 견고하게 된다.

 

   ⊙ 쐐기-산지못

   기물제작 과정에서 골격 구성을 위해 골주끼리 짜 맞추는데, 결속시 헐거운 장부촉이 생기게 된다. 이때 부족한 결속에 대한 밀착 결속의 위해 쐐기를 박는다. 쐐기를 박을 때는 먼저 장부촉에 의해 들어갈 구멍을 설정하며, 설정된 구멍에 꼭 맞는 장부촉을 끌로 찍어 만든 틈새로 쐐기를 박아 팽창시켜 완전 결속을 도왔다. 이는 골격이 분해되지 않도록 하는 일종의 나무못이다.

   이러한 쐐기는 골주와 골주의 결속에 주로 쓰인다. 골격 구성에 있어서 결속은 무엇보다도 길술적이고 완전한 결속을 전제로 한다. 그러므로 쐐기는 모든 결속에 쓰이지 않고 보강이 필요한 경우 또는 결속을 강화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 통례이다. 또한 제작과정에서 시간이 흐른 후에 헐겁게 되ㅇ?ㅆ을 때도 결속을 강화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쐐기는 본 굴격체인 나무를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대나무는 사용하지 않았다. 쐐기는 설정된 구멍 내에서 쓰이므로 머리는 두껍고 끝은 얇다. 형태는 머리부분頭部이 굵고 끝은 얇은 모양인데, 형태가 대나무못처럼 끝이 뾰족한 사각뿔의 형태가 아니라 변이 있는 모양으로 머리와 끝이 같은 폭을 갖추고 있다. 끝부분이 얇지만 넓은 면의 모양이다.

   쐐기는 ‘V'자 모양의 각을 활용하는 것으로 틈새에 점점 박아 넣으면서 팽창되는 힘을 이용한다. , 완전 결속이 이루어졌을 때는 대나무못처럼 표면의 머리 돌출부분은 제거한다.

 

   ⊙ -방두산지

   밀착 결속 역할의 촉

   촉은 판재 양쪽의 장부촉을 길게 내고, 돌출된 장부에 구멍을 내어 박아 고정하는 나무못이다. 촉은 굵은 나무토막 모양으로 견실하다. 또한 끝은 머리보다 가늘지만 부러질 정도로 가늘지 않고 뾰족하지도 않다. 후압박을 가하게 되는 촉은 그 길이가 힘의 받침점 역할을 함으로써 본체에 바짝 붙어 있게 된다. 이를 방두枋頭산지라고도 한다.

   쐐기와 촉은 밀착 결속을 도와줌으로써 기물을 견고하게 한다는 점은 같지만, 그 방법은 다르다. 촉은 결속되는 나무가 빠져나갈 수 있는 통로를 완전히 차단하여 조여줌으로써 나무간의 결속을 강화하는 것이다. 쐐기는 틈새에 들어 박혀 끝이 보이지 않고 나무 속에 묻힌다. 반면에 촉은 전체 가운데 부분만 나무 속에 끼어 있고 노출되어진 돌출부를 제거하지 않으므로 양끝이 보인다. 쐐기는 한번 사용되면 그것으로 역할을 다하고 끝이지만 촉은 교체가 가능하다. 결속이 헐거워지면, 박힌 촉의 끝을 쳐서 빼고 이를 다시 조절하여 박거나 새 촉을 사용할 수도 있다.

   촉도 골주와 골주 결속에서 볼 수 있으며, 굵은 머리 부분이 박아 넣을수록 골주와 골주의 결속이 강화된다. 밀착결속 역할이 아니라 다만 박혀있는 것으로 역할을 하는 예로 수레 굴대머리에 바퀴가 빠져 나오지 않도록 내리 꽂은 큰 못이 장촉(비녀촉)이다. 촉의 다른 활용이다.

 

   2. 연결(이음)역할의 촉

   촉 중에는 밀착 결속이 아니라 단순한 연결 이음 매개체로서의 역할을 하는 촉도 있다. 이같은 연결매개체로서의 촉은 두 널판재의 평면 연속 연결을 위해 제3의 매개체가 들어박힘으로써 연결이 되는 것, 즉 판재끼리 맞붙이기 위해 각각 맞닿은 면 가운데에 홈을 파내고, 다시 연결축을 꼭 맞게 만들어 끼움으로써 두 판을 연결하는 촉으로 밀착 결속의 촉과는 전혀 다른 기능이다 .이때는 촉이 입수될 판재를 촉의 두께에 맞추어 도려내므로 배면까지 뚫리지 않는다. 도려낸 부분에 촉을 끼워 넣으면 돌출되지 않고 면에 꼭 맞게 평면적으로 된다.

   또한 촉은 쪽매(넓은 면판재료를 구성하기 위해 작은 판들이 합친 각각의 소단위 판재)의 연결 뿐만 아니라 평면의 벌어진 곳에도 촉을 이용해 더 벌어지지 않게 하며, 육면체의 상하연결이음에도 요긴하게 쓰인다. 예를 들어 관인 경우는 이는 철못을 쓰지 않고도 결속시킬 수 있는 좋은 예이다.

   이처럼 촉이 연결역할을 할 때는 연결촉또는 은장이음이라 분류하며, 그 모양에 따라 중구촉, 원두은장촉, 은촉 등으로 촉 이름을 따로 붙인다. 예를 들어 두 널판재에 장구 모양으로 걸쳐서 연결 결속하는 경우에는 장구(촉장구은장이음)이라 불린다.

 

 

 

 

조선후기 궤에 남은 문자향

-궤명櫃銘을 살펴보면서-

 

이갑규
대구대학교 겸임교수, 한문학자


 

   궤명櫃銘이란

   궤명櫃銘은 궤에 명이란 문체로 남아 있는 글을 말한다. 물론 궤에는 명이라는 글만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나 혹은 단구短句로 새겨져 있기도 하다. 그런데 명은 궤를 사용한 사람이 어떠한 사연이나 경계의 뜻을 담아놓은 글이 많기에 명이 새겨진 궤는 시나 단구가 새겨진 것보다 특별한 기물이라 할 수 있다.

   본래 명이란 문체는 주로 기물器物이나 금석金石에 새겨 넣은 글로 잊지 않고 늘 기억하고자 하는 효과를 꾀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용도는 다양하였는데 어떤 인물의 공덕을 찬양할 때 명이란 문체를 많이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 뜻을 살펴보면, 문장변체文章辯體에는 은 명이다. 기물에 어떤 명분을 새겨 스스로 경계한다는 뜻으로 말하였고, 사물원시事物原始에는 은 지이다, 그 일의 아름다움을 기록하는 것이다의 뜻으로 풀이하였다.

   그리고 명은 운문韻文으로 이루어진 문체로서 한 구 건너 소리의 음을 통일시킴으로써 음악적인 효과를 살려 쉽게 부를 수 있고 빨리 기억되게 하려는 글이다. 현재 명으로 남아 있는 글 중에 가장 오래된 것은 상나라 탕임금이 그의 목욕통에 새겨넣은 반명盤銘이다.

 

   苟日新 진실로 어느 날 새롭게 하였거든

   日日新 매일매일 새롭도록 마음을 닦고

   又日新 또 날로 계속 이어 마음을 새롭게 닦아 가라

 

   신자 운을 사용하여 지은 명이다.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황유기명黃楡이란 것을 보면

 

   ?누른 느릅나무 깍아

   具四脚 네 다리를 갖추었네

   質又澤 바탕 또한 윤기 나고

   其廣踰尺 너비가 한자 넘네

   究其用 용도를 규명해보면

   書也非其局 책상이지 바둑판은 아니라네.

 

   느릅나무로 만든 책상에 입성入聲의 격구운隔句韻 을 사용하여 아름다움을 기록한 명을 새겨 넣은 것이다. 은 이러한 형태로 운을 사용하고 글자수도 3, 4, 5, 7자 등으로 사용하는데 같은 글자수로 통일하여 쓰기도 하고 섞어 쓰기도 하였는데, 그 다양한 문체는 여기서는 다 언급하지 못한다.

 

   궤의 실용적인 가치

   우리나라는 유학에 근거한 과거제도를 실시하여 과거에 의해 관리가 배출되어 귀족문화를 선도해 오면서 화려한 겉치장의 문화를 배격하여 왔다. 유학의 정신은 검소하고 질박하여 진실한 것을 숭상하였기에 중국에서처럼 화려한 채색의 장식과 칠보, 자기 등의 치장은 적었다. 일부 귀족의 부호층을 제외하고는 거의 청결하고 검소한 물건들을 귀중히 여긴 편이다.

   그러므로 통나무의 원색바탕을 그대로 살리거나 장석 몇 개의 치장하는 정도였는데 주로 느티나무, 느릅나무, 참죽나무, 먹감나무, 박달나무 등의 단단한 재질을 이용해 나무의 문양을 살리는 치장이 정결하면서도 고졸한 맛이었다. 그렇지도 못할 땐, 주로 종이로 배접하여 단정하고 소박한 멋을 풍겼었다. 거기에다 애송하는 글귀나 경구警句를 써서 붙이기도 하였고 실용적인 면으로서 실제 안에 넣어두는 물건들의 목록을 게시하여 붙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것들이 좋은 글씨이거나 좋은 문장일 땐 그 문기文氣가 화려한 채색을 능가하는 운치가 있어 사람의 영혼을 편안케 해줌은 말할 것도 없다.

   예를 들어 류씨柳氏 집안에 소장된 제기궤를 보면, 앞닫이문판 안쪽에 제기목록이 게시되어 물건의 분실과 유무를 쉽게 알 수 있도록 해놓았다. 반기구개 이飯器俱蓋二, 탕기구개 이湯器俱蓋二, 면기구개 이麵器俱蓋二, 시저 이건匙箸二件, 잔반 이대盞盤二臺, 탕중발 십이湯中鉢 十二, 제기접시 십오祭器接匙十五, 종자 삼鐘子三, 임술 101壬戌十月一日, 유사有司 柳某로 되어있다.

   또 전라도 지방의 반닫이 중에서 책궤로 사용한 것으로 앞판에 서책이라 명시하고 아래쪽에 청심淸心, 양식良識이라 새겨 놓아 한결 고졸하면서도 문기의 향기가 풍기고 있다.

   그 반면, 호봉당虎峯堂 집에 있는 쌀궤에는 정해구월초치일조성丁亥九月初七日造成이라 쓰고 밑에 수결手決이 되어 있으며 또한 쌀의 용량도 미칠십오두이입米七十五斗貳入이라고 표시해 놓았다.

   또 한편으로 재미있는 것은 우리의 민속에 주술과 기복의 신앙은 궤 속에까지 배여 있음을 볼 수 있다. 앞닫이문판 안쪽에 경명주사로 쓴 목신부木神符의 부적이 붙어있다. 그런가 하면 오행설이나 팔패八卦, 십이지十二支 등의 방향을 수시로 참고하기 위해 도표를 그려 붙인 것들도 있다.

 

   선비들이 궤에 새긴 시와 명

   궤에 새긴 문구로 시나 명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아마 장인이 나름대로 상식을 가지고 새긴 경우도 있겠고 사용자가 직접 글을 지어 주문제작한 경우도 있었던 것 같다.

   서궤의 앞 문판에 새겨진 시 두 수를 우선 감상해보자.

 

   蒼顔己是十年前 창안의 청춘시절이 벌써 십년전이라니,

   把鏡回看一거울을 잡고 고개를 돌려보니 온통 서글퍼지는구나.

   履薄臨深諒無幾 엷은 얼음 밟듯, 깊은 소 위에 서 있듯 조심할 날이 진실로 얼마 남지 않았으니,

   且將餘日付殘編 또한 장차 남은 생을 잔편殘編에 붙이리라.

 

   여기서 잔편殘編은 책을 의미한다. 이 궤의 주인공은 아마 독서와 함양으로 일관한 선비인 듯 한데, 자신의 감회를 주자朱子의 시를 빌어 읊어 놓았다. 주자가 읊은 이 시의 본 뜻은 남성南城에 있는 오신, 오륜 형제가 사창社倉을 짓고 주자에게 기문을 지어 걸었을 뿐만 아니라 주자의 영정까지 걸어 놓았었다. 주자는 그 영정의 모습을 보고 읊은 시이다. 엷은 얼음 밟듯, 깊은 소 위에 서있듯 한다는 구절은 시경詩經 소민편小旻篇의 구절이다. 공자의 제자 증자는 일생동안 마음닦고 경계하기를 엷은 얼음 밟으면 꺼질까, 깊은 소 위에 서면 떨어질까 긴장하듯 마음이 순간도 망상 잡념에 뺏김이 없도록 치열한 경계를 하였다고 말한데서 유래하여 선비의 마음공부하는 수행경계로 전송되어온 글이다. 좌측에 새겨진 다음 한 수는 이러하다.

 

   讀書不見行間墨 독서에는 글줄 사이의 문자만 보아서는 안된다는,

   始識當年敎外心 옛날 그 당시의 가르침 밖의 마음 전하는 것을 이제야 알았도다.

   箇是?家眞寶藏 이것은 내 집에 소장한 참된 보물이니,

   不應猶羨滿?金 오히려 상자에 가득 찬 황금이 부럽지가 않구나.

 

   이 시 또한 주자가 유양의 이씨 遺經閣유경각에 지어준 글이다. 유양의 이씨는 자제들을 당시 최고 석학인 장경부에게 입문을 시켜 사사받게 하였고 도서를 갖추어 유경각을 지어 자제들의 독서를 권장했던 것이다. 이 책궤를 소장하였던 주인이 이러한 특정의 시를 뽑아 자신의 주관을 투영해 놓은 것을 보면 장인에게 별도로 주문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먼 세월의 뒤편에서 궤를 바라보는 우리들은 궤 밖에서 풍기는 문기文氣가 흠씬 배여 있음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시가 새겨지지 아니한 궤였다면 시커먼 졸박함 외에 삭막한 정서만이 흐르지 않겠는가.

   궤의 종류는 다양하지만 궤명이 남아 있는 것으로는 역시 선비들이 사용한 책궤이거나 문서궤들이다. 당송 팔대가의 한 사람인 송나라 왕안석王安石은 그의 권학문에 이러한 말을 하였다.

 

   有卽起書樓 살림이 있으면 서루書樓를 일으키고

   無卽致書櫃 살림이 없으면 서궤書櫃를 만들어라

 

   서루書樓는 오늘날의 도서관이다. 위에서 본 유경각이 바로 유양의 이씨 도서관이었다. 살림이 여의치 못할 땐 서궤라도 만들어 책을 보관토록 권한 것이다. 옛 청빈한 선비들은 책궤를 장만하기도 쉽지 않았다. 그런 경우 널판을 맞추어 종이를 배접하여 글을 써 붙인 경우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부유한 살림으로 좋은 서궤를 장만하는 집에서는 추사 선생의 글씨 대련구를 모각하여 새기기도 하였다.

 

   康成階下多書帶 한나라 때 정강성의 서재 섬돌 아래엔 서대초書帶草풀이 자랐고

   董子篇中有玉杯 한나라 동중서의 책편에는 옥배玉杯라는 저서가 유명하였도다.

 

   이 글은 추사 선생이 청나라 때 대학자요, 정치가였던 유용의 대련구를 보고 써서 재종손 김태제에게 준 글이었다. 이 뿐만 아니라 명가의 글을 모각하는 경우가 많았고 자신이 직접 쓰기도 한 것이다.

   근세의 거유巨儒 추연秋淵 권용현權龍鉉 선생은 어머니가 시집올 때 가지고 온 옷궤를 종이를 발라 사용하다가 어머니 돌아가신 후 방치되자, 자신이 직접 종이를 발라 궤명櫃銘을 지어 붙여서 늘 거처하는 왼편에 두고 옷을 보관하였다. 궤명을 감상하면 다음과 같다.

 

   質而樸, 昭儉約也 질박함은 검소와 절약을 밝힌 것이고,

   闔而闢, 餘手澤也 여닫을 때는 어머니의 수택手澤이 남은 것이로다.

   吾母始終與共歷也 우리 어머니 일생동안 함께한 물건이요.

   蔽裙短裳服無?也 헤어진 중의, 짧은치마 평생을 입어도 싫어함이 없으셨도다.

   爾襁爾褓藏厥績也 나를 길렀던 포대기 어머니의 손수 짠 길쌈으로 만든 것을 저장했던 것이고,

   育恐育鞠此其跡也 노심초사하여 길러주신 은혜 여기에 자취가 남았도다.

   摩?沒身敢忘吾母之德 내 죽는 날까지 만져 감히 우리 어머니 은덕을 잊을까!

 

   추연 선생은 가끔 80노령에도 어머니에 대한 얘기를 나누다가 눈시울이 적셔지기도 하였다. 질박한 하나의 물건이었지만 궤명의 사연을 읽고 나면 더 없는 향기를 느낄 수 있는 궤였다.

   필자도 조부 밑에 자라면서 일생을 검소하고 근면한 정신으로 일관한 삶의 철학을 체험하였다. 서재에 놓였던 서궤書櫃를 잊을 수가 없었고 또한 소홀히 할 수 없었다. 참으로 질박하고 시커먼 보잘 것 없는 물건이었지만, 화려해도 혼이 스미지 않은 물건이 있는가하면 투박해도 영혼이 머무는 물건이 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궤명櫃銘을 지어 붙이고 늘 곁에 두고 있다.

 

   櫃雖璞陋 궤가 비록 질박하고 누추하지만,

   王考遺傳 내 할아버지께 남겨 전한 것이라네.

   豈無新物 어찌 새로운 물건이 없어서일까만,

   手澤尙新 할아버지의 수택手澤이 오히려 새롭기만 하다네.

   摩如在 내 손으로 문지를 때 마다 꼭 할아버지 계시는 것만 같으니,

   何不貴珍 어찌 이것이 귀한 보배가 아니겠으리.

   癸未初夏奉祀孫 甲圭謹題 계미년 초여름에 봉사 손 갑규는 삼가 쓰다.

 

   우리는 풍요로운 현실을 살면서 쉽게 물건을 장만하고 또한 그것을 쉽게 버린다. 그러기에 고졸하고 검소한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를 후세들에게 가르치기도 힘든 것이 사실이다.

   옛 장인들이 만들고 옛 조상들이 사용한 저 물건들이 우리의 혼이요 유산일진대 문기 어린 궤 하나에서도 삶의 철학을 들여다 볼 수 있다. 새 것과 화려함은 일시적인 감상에 불과한 것이고 세월이 지나도 향기가 남을 수 있는 것이 영원한 것이다.

   아무리 훌륭한 장인의 물건도 오래 쓰다가 보면 싫증이 나기 마련이고 그러면 곧 버리게 된다. 이는 어떤 삶의 혼이 묻어 있지 않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더구나 때묻고 빛 바래 옛 물건에 별다른 애정이 갈 순 없는데, 그것을 금전으로 보상되는 것만으로 생각할 때 우리의 삶은 너무나 척박하고 속되며 경박한 풍조를 이루어가는 것에 일조를 하는 것 밖에는 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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