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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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보건대학 대구아트센터 특별소장전

  • 전시명:한국의 장롱
  • 전시장소:대구보건대학 대구아트센터
  • 전시기간:2005-10-13 ~ 2005-10-30

 

 

대구보건대학 대구아트센터 특별소장전 <한국의 장롱>

 

 

우리네 어머니의 마음을 담아서

 

이번에 발간하게 되는『한국의 장롱』은 본 대학이 소장하고 있는 장롱 가운데 생산 지역과 조형미의 다양성을 기준으로 130여 점을 정리하여 엮었습니다.

본 대학의 아트센터에서는 전통 공예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특히,조선조 목공 장인들의 유물이 흩어지는 것을 안타까이 여겨 이 방면에 힘을 기울여 왔던 바,그 작은 성과를 집성한 것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장롱은 주로 예전에 안방에서 사용하던 것입니다. 우리네 어머니, 그 어머니의 어머니들이 애지중지하던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그것만도 아닙니다. 물론 규모나 수량 면에서 안방의 장롱이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합니다만 책을 담는 책장은 사링방에 있었고,부엌에는 찬장도 있었습니다.

옷장이건 책장이건 간에 사물을 정돈하여 수납하는 기능을 지닌 장롱은 그 육면체 형태가 그러하듯이,단아한 안정감의 미학을 우리에게 전해 줍니다. 그뿐 아니라,그러한 단정한 아름다움 위에다가 어떤 장롱들은 화려함의 미학을 덧붙이기도 합니다. 서로 상반되면서 미적 세계의 두 축을 이루는 단아함과 화려함의 미학을 우리 장롱에서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장롱이 잘 배치된 방, 그리고 차곡차곡 단정하게 수납된 장롱은 우리의 마음을 고요히 안돈시켜 줍니다. 장인들의 나무 다루는 섬세한 공력과 또 장롱을 갈무리하던 여인네의 정성어린 손길을 동시에 느끼게 되면 우리의 조선조 장롱은 생활 용품 이상의 정서적 구조물, 다름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담는 공간임을 깨닫게 됩니다.

예전,그 장롱에 담겼던 물건들은 세월 속에 흩어져 버렸고 지금은 텅 빈 장롱만이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빈 공간에다 선조들의 손길과 정성을 추억하고 기리는 마음을 담아 봄으로써 번다한 현대 생활에 지친 우리의 마음을 정돈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해 보는 기회로 삼았으면 합니다.

 

대구보건대학 학장   남 성 희

 

 

 

With our mothers' hearts

 

The 『Korean Chest and Trunk』 is based on about 150 wardrobes carefully chosen from our college’s wardrobe collection based on where they were manufactured and the diversity of their beauty in terms of formative art.

Based on our interests in traditional applied fine arts, our college art center has especially focused on the preservation of the relics of the Chosun Dynastys wood craftsmen, and this collection can be regarded as the fruits of our efforts.

As you well know, wardrobes were usually used in the main bedroom in the past. They were treasured by our mothers, their mothers, and their mothers, ancestors. They did not only value wardrobes in main bedrooms but also bookcases in study rooms and kitchen cupboards as similar kinds of storages containing their daily living.

Whether they were wardrobes or bookcases, they all functioned as storage pieces and had simple hexahedral shapes. The simple but graceful figure gives us the aesthetic feeling of stability. Furthermore, some of them add decorations to enhance the wardrobe’s splendor. Although they have opposite characteristics, one can find the harmony in the simplicity and at the same time splendor of our wardrobes.

The room, which has a good wardrobe layout, and the wardrobe, which is well organized, make our hearts stable and calm. When we look at them, we feel not only the craftsmen’s refined efforts but also the hands of the women who polished them. We can assume that the wardrobes during the Chosun Dynasty were more than just items for daily living; they comprised emotional structures and heartfelt spaces.

Now, only the empty wardrobes are in front of us because the articles they contained have been long gone. However, we should try to store our hearts in that space remembering our ancestors' graceful hands and efforts. As we do so, we could take this opportunity to look back at our hearts, transcend our busy modern lives, and check our identities once again.

 

Nam, Sung Hee

Dean of Daegu Health Colle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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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롱을 위한 다섯가지 변주

 

손영학
대구아트센터 큐레이터

 

   장롱의 미덕

 

   한국의 전통 목가구의 무게중심은 장롱에 있다. 장롱은 장과 농을 합쳐서 부르는 말이다. 장과 농은 구조적으로 다르다. 여러 층으로 되어 있어도 장은 몸체가 하나로 이어져 있고, 농은 한 층 한 층 따로 분리되어 포갤 수 있도록 했다.

   장롱의 쓰임새는 주로 옷을 넣는 것이다. 그래서 장롱은 곧 옷장으로 인식되어 왔다. 좀 더 넓은 의미로 장의 범주에는 찬장, 책장 등도 포함되었다. 장롱은 안방과 사랑방의 공간적 특성을 분명하게 드러내주는 역할을 함으로써 집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장롱은 사람의 손길 아래서 더 은근해져 온 우리의 옛 가구들은 세월이 흘러가면 그저 낡아버리는 게 아니라 대물림되어 왔다.

   장롱을 탑의 양식으로 비유해 본다면 불국사의 다보탑과 석가탑에 견줄 수 있다. 농이 선과 형으로만 잘 조화된 하나의 균형미를 보여주는 석가탑이라면 장은 온갖 기교와 장엄으로 섬세함과 미려함을 보여주는 다보탑이라고 할 수 있다. 서양건축양식으로 치면 장은 정교하게 다듬어진 세부를 보여주는 이오니아 양식Ionic oder이며 농은 장중하며 단정한 도리아 양식Doric order이 된다.

   장롱의 미덕은 정신을 담는 그릇인 몸, 그 몸을 감싸는 옷가지들을 단정하게 건사해준다는데 있다. 옷을 손수 마르고 꿰매고 다렸으니 어찌 보배롭지 않았으랴. 한 켜 한 켜 얌전하게 개켜져 있는 옷가지는 층을 이루며, 계절마다 순환의 리듬을 엮어낸다. 깊숙한 곳에는 언제나 팔 벌리고 서 있는 느티나무 품 속 같은 의지처 하나 마련해 두었을 것이다.

   장롱은 살림형편이 넉넉한 집안에서나 가질 수 있었다. 요즘으로 치자면 대형벽걸 텔레비전 쯤 될까. 장롱을 가지지 못한 이들은 그나마 단순한 네모상자로 대신했을 뿐이다.

   장롱이 소중한 것은 단순한 기능적인 요소보다 마음을 안돈시켜주는 정신적인 의미가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산산한 삶을 다독이고 마음의 주름살을 펴주는 동반자, 그렇기에 가히 일생동안 가까이 두고 사랑해왔다. 은 찬바람이 불어도 장롱 안엔 포근한 봄바람을 느끼면서.

 

 

   장롱을 보는 또 다른 시선

 

   만든 솜씨야 제각각이지만 그 나름대로 깊은 풍미를 자아내는 게 장롱이다. 지금은 서구양식으로 획일화되다시피해서 주거도 서양식이고 옷도 우리 옷이 아닌 양복 · 양장인지라 그 정체성을 상실해 갔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오늘날까지 수납을 위한 공간으로 장롱을 들여놓고 혼수품의 필수품으로 손꼽는다.

   장롱은 그 시대의 생활양식을 반영하고 있다. 이 도록에 수록된 장롱은 대부분 100년에서 200년 전의 것이다. 멀게는 조선 전기의 것도 있지만 가까이는 해방 이전의 것도 있다. 언뜻 보면 비슷하게 보일지 모르나 같은 것은 단 한 점도 없다.

   예전에 사용했던 장롱이 잊혀졌던 아날로그식 방식의 삶을 회상케 해준다면 그것은 편협함의 소치다. 장롱은 디자인적인 측면에서나 가구적인 측면에서 총체적인 미감을 담고 있다. 온갖 장석에 다채로운 문양이 내재해 있으며, 그 문양들은 강한 상징성을 띄고 있다. 또한 현대 공예에 응용할 수 있는 다양한 소재를 발견할 수 있다. 장롱은 우리 전통자생목의 소중한 집합체이기도 하며, 옻칠 · 주칠 · 황칠 같은 칠의 세계와 화초장 · 화각장 · 나전동에 베풀어진 회화성, 글씨와 그림을 새긴 전각篆刻까지 다각도로 심층적인 연구자료를 제공한다. 말하자면 수 백 개의 아이콘icon이 무수히 내장되어 있는 것이다.

   단지 하나의 정물로 머물지 않고 소통과 교감을 꾀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장롱이다.

 

 

   장롱의 표정

 

   장의 구성에서 정면 얼굴만 본다면 목조건축물 구성과 흡사하다. 기둥을 세우고, 드나드는 곳에 문을 만들고 벽을 만드는 것과 같이 골주로 뼈대를 구성하는 동시에 여닫이문과 나머지 면을 마감한다.

   선과 면의 흐름을 중시하는 장롱의 구조미는 앞면의 면분할과 그 공간구성에 있다. 장롱 앞면에는 두 개의 문짝이 있고 문짝의 위아래와 좌우에 넓은 면이 남아있다. 문짝을 중심으로 생겨나는 면들은 골재인 기둥과 쇠목 사이에 다시 가는 골재인 선쇠목과 가로동자, 세로동자에 의해 분할되어, 작은 판재로 구성되는 머름칸과 쥐벽칸이 생기고 빼닫이도 생긴다.

   장의 앞판을 쇠목이나 동자로 면분할하는 것은 나무의 실용적 효용가치와 내구성 때문이다. 결이 섬세한 나무일수록 계절에 따라 수축 팽창이 심해 골재로는 부적당하고 또 그런 식으로 무늬목을 사용하기에는 그 양을 감당해내지 못한다. 이 두 가지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생각해낸 것이 바로 면분할이다. 단단한 골재에 얇게 켠 무늬목을 덧대면 휘거나 터지는 것을 막을 수 있을 뿐 아니라 무늬목이 얇고 작기 때문에 많은 양의 대칭되는 무늬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면분할에서 얻어지는 또 하나의 구성의 묘미는 면과 면이 직접 서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동자와 쇠목이 그 사이에 있으면서 반월半月모로 뚜렷한 경계를 이룬다는데 있다. 복판, 머름칸, 쥐벽칸, 이 모든 것들은 쇠목이나 동자 사이에 부착된 것처럼 보이지만 쇠목과 동자에 홈이 파져 있고, 그 홈 속에 판재가 여유롭게 끼워져 있어 신축에 상관없도록 되어있다.

   방에 들어서면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가구가 갖는 비례의 아름다움이다. 가구가 놓이는 방도 낮은 천장과 앉은 키에 맞춰 제작했다. 가구는 전체적인 균형에 맞게 어느 부위든 간에 과장되거나 왜소하지 않게 비례가 적절해야 한다. 이는 한국 주택양식이 갖는 특이한 환경에서 나온 것이다. 좁고 낮은 온돌방과 여기에 딸린 대청마루와 주방 등의 한정된 공간 속에서의 좌식坐式생활은 자연히 중국이나 서구의 의자생활과는 매우 다른 규격과 형식을 낳았다.

   간추려 말하자면, 장롱의 정련하고 반복적인 구성이 주는 미감은 사계절에 따른 기온의 변화와 기능성을 우선한 내구성과 적재적소適材適所의 나무 활용에서 나온 것이다.

 

 

   장석의 다른 이름, 금상첨화

 

   나무로만 이루어지면 자칫 무덤덤해질 수 있는 가구에 생기를 불어넣는게 장석 베풀기이다. 장석은 전통가옥에 알맞은 공간개념과 심미안으로 베풀어진다. 안채는 화사하고 밝아야 하기에 주석이나 백동을 사용했고, 그 모양새도 서정적인 선율이 흐르고 온화한 정감을 불러일으킨다. 반면 사랑방은 검소하고 안정된 분위기를 추구했으므로 무쇠장석을 주로 사용하고 그 형태도 간결했다.

   장석은 반드시 일체감이나 통일감을 주었다. 나무결이 좋으면 장석을 간결하게 썼고, 나무결이 볼품 없으면 장석을 화려하게 썼다. 나뭇결이 뚜렷한 재목은 아름다운 그대로의 자연미를 표현하기 위하여 과다한 장식을 피하고 대칭적인 배열을 했다. 어지러운 나무결에 장식마저도 그러하면 불협화음을 이루기 십상이다. 이는 항상 하나가 모자라면 하나를 채우는 음양의 조화를 고려한 것이다. 장석은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아야 보는 사람의 마음에 부담이 없다. 후대로 내려올수록 장석을 복잡하게 메꾸어 나무의 맛을 상실해 버린 것들이 심심찮게 보인다. 물론 나전칠기 제품이나 화각으로 만든 가구도 있지만 그러한 것은 귀족과 부유한 일부계층에서 사용되었다.

   장석은 전체를 견실하게 해주는 구조적 보강이 가장 우선이지만, 여기에 아름다움을 보태고 또다시 행복과 강녕을 기원하는 상징성을 보태어 사용하는 이의 마음에 기쁨이 차게 했으니 가히 금상첨화錦上添花라 할 만하다.

 

 

   조선 목가구의 힘

 

   가구에서 우선시 되는 것은 무엇보다도 실용적인 측면이다. 견실해야 하고 사용함에 불편이 없어야 한다. 그 다음이 조형성이라고 할 수 있다. 조형미 역시 구조를 통해 자연스럽게 이루어 지는 것이다.

   한국 고가구를 평가할 때, 삼박자가 맞아야 명품이라고 말한다. 소목장의 기술과 조형감각, 그것을 고르고 구입할 줄 아는 사람의 안목과 경제적 능력, 쓰는 이의 정성과 애정이 맞닿아 축을 이룰 때 명품은 셈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니게 된다.

   세월의 퇴적은 정직한 나이테로 새겨진다. 나이테는 세월의 퇴적층이다. 나무는 죽어서도 숨을 쉬다고 한다. 이 나이테는 어떻게 켜느냐에 따라 다르고 어떤 대패로 미느냐에 따라 다르고 기술이 어느 정도냐에 따라 다르다. 제각각 숨을 달리 쉬어 나타나는 나무의 결에 따라 만들었을 때 느낌도 다른 것이다.

   나무를 볼 줄 알고 다룰 줄 아는 것도 목수의 중요한 기능에 속한다. 아교칠과 여러 나무의 부착으로 이루어지는 장롱 제작은 보통 정성으로는 엄두도 낼 수 없는 대단히 복잡한 일임에는 틀림없다. 장롱의 아름다움은 자연 그대로이다. 자연의 일부로서 장롱이 존재하기에 우리는 편안함을 느끼는지도 모르겠다.

   옛 가구에 대한 접근은 의고주의적 이거나 유물론적으로 접근해서는 안되며 기능과 아름다움의 조화라는 측면에서 살펴야 할 것이다. 비록 기념비적이진 않으나 제 빛깔과 향기를 내며 생활 속에서 익어갔던 우리의 목가구를 사랑할 수 밖에 없다.

 

 

 

 

 

장롱의 본 집안 살림의 민속

 

배영동

안동대학교 국학부 민속학전공 교수

 

   우리 민족이 사용하던 어떤 물건이든지 간에 거기에는 우리네 삶의 방식이 개입되어 있으며, 당대 사회에서 통용되던 나름대로의 의미가 부여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한민족이 쓰던 물건을 통하여 우리 문화를 읽어낼 수 있으며, 우리민족의 사고방식을 이해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장롱 또한 한국 전통사회에서 널리 사용된 가구라는 점에서, 한국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작은 통로가 된다.

   장롱은 한국의 전통적 목가구를 대표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장롱은 어느 가정에서나 필수적이고 그 형태나 종류가 무척 다양했을 뿐만 아니라, 특히 예의를 갖추는 데 긴요한 의류를 보관하는 가구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분에 따라, 경제계층에 따라, 지역에 따라, 성별에 따라, 목수나 소비자의 취향에 따라 장롱의 생김새와 재질 등에 차이가 있기 마련이었다. 장롱의 의미가 사회적 · 문화적 · 경제적으로 다르게 부여될 수 있는 근거도 바로 여기에 있다.

   대부분의 장롱은 의류나 서적, 기물 등을 보관하는 용도로 쓰였다. 장롱 가운데서도 의류를 보관하는 옷장이 가장 흔하고 대표적이었으며, 그리하여 옷장과 장롱이 동일시되었다. 옷장은 주부가 거처하는 안방, 가장이 기거하는 사랑방 등과 같이 생활의 핵심공간이 되는 실내에 두고 쓰는 것이라서, 갖가지 장식과 미적인 꾸밈이 더해졌다. 특히 안방가구를 대표하던 장롱은 안방 주인의 품위, 연령, 취향 등에 따라서 색상과 장식 등에 다양성을 드러냈다. 나아가 안방에 어떤 형태나 색상의 장롱을 두느냐에 따라서 안방의 분위기가 사뭇 달라졌다. 안방의 분위기 조성에는 장롱만한 것이 없었던 셈이다.

   신혼방을 꾸미는데도 장롱은 가장 큰 효과를 발휘하는 가구였다. 이런 배경 때문에 신부가 시집을 올 때는 옷장을 마려하여 오는 것이 오랜 전통으로 자리 잡아 왔던 것 같다. 시집 올 때 우선 시어른과 신랑 신부의 옷과 침구류를 마련하고, 형편이 조금 나으면 옷장을 갖추어서 왔다. 그러므로 장롱에는 신분과 경제력, 취향 등이 작용하여 다양한 디자인이 형성되었다. 물론 갖가지 장식이 가미되어 미학적 가치도 고조되었다.

   장롱에는 혼례 때 사용하던 사주단자四柱單子, 예장지 등을 깊숙이 보관하였다. 또 신혼 첫날에 입었던 속옷을 죽을 때까지 장롱 속에 꼭꼭 넣어두었다가, 관속에 넣어가지고 가는 풍속도 널리 퍼져 있었다. 정절을 지키며 살다가 시댁의 귀식이 되겠다는 여인들의 각오이자 맹세이리라. 시집 올 때 친정어머니가 해주신 여러 가지 옷도 세상이 바뀌어 입지 못한 채 장롱 속에 차곡차곡 쌓여있는 예도 어렵잖게 발견된다. 귀중한 물품도 흔히 장롱 속에 보관하였다. 이쯤 되면 장롱은 단순히 집안의 중요한 가구를 넘어서서, 한 집을 이룩한 핵심적 상징물의 의미도 갖게 된다.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면 장롱은 신앙대상으로까지 확대될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삼신과 같은 가신家神도 안방 장롱 위 한쪽 구석에 모셔지는 일이 많았다. 의술이 발달한 요즈음에는 심신이라는 것이 별 볼일 없는 존재이지만, 예전에는 아이의 잉태, 출산, 성장을 관장한다고 믿었던 신이었으니 그 존재 가치는 대단히 컸다. 특히 시집온 며느리가 제 때에 아이를 낳지 못하면 삼신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삼신이 아이를 점지해 주어야만 잉태를 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내아이가 없는 집이나 잔병치레를 자주하는 아이가 있는 집에서도 삼신은 가문의 번창 여부나 흥망을 좌우할 만큼의 절대적인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삼신이 장롱 부근 높은 곳에 모셔졌으니, 주부들이 장롱 앞에서 무언가를 비는 것은 곧 자신이 살고 온 집안을 살리는 소망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주부들은 아들 딸 건강하게 잘 자라게 해달라고 장롱 앞에서 비손을 하면서 집안의 안녕을 간절하기 기원하기도 했다.

   장롱을 만들 때에는 의미 있는 글씨, 그림, 문양 등을 넣었다. 이것은 보기 좋게 꾸미는 것이기도 하지만 일정한 염원을 담아서 그 꿈이 실현되기를 바라는 것이기도 했다. 자손을 번창하게 해주고, 건강하게 오래 살며, 부귀와 복록을 마음껏 누리기를 바라는 내용을 글씨, 그림, 문양 속에 담아 표현하였다. 이는 비슷한 원인 행위가 비슷한 결과를 낳는다는 이른바 유감주술의 원리에서 나온 것이다. 주부들이 복된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초자연적인 힘이 장롱에도 부여되어 있는 만큼, 주부가 장롱 앞에서 무언가를 정성껏 비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기도 했다.

   이사를 갈 때에도 시집올 때나 마찬가지로 장롱을 무척 소중하게 여겨서 각별히 신경을 써서 옮겼다. 이사시에는 가장 먼저 부엌의 밥솥을 옮겨서 걸고 안방 아궁이에 불을 피우고, 이어서 장독이나 장롱을 옮겨서 집안으로 들였다. 밥솥이나 장독은 생명을 상징하는 식생활의 영역이고, 장롱은 격시과 예의를 상징하는 의생활의 영역이며, 아궁이에 불을 ldn는 것은 온도조절 장치인 가옥에 생명을 불어넣는 의미로써 주생활의 핵심이다. 이사에 따르는 의식에는 기본적인 삶의 요건인 의 · · 주생활의 상징적인 요소가 동시에 작동하고 있다. 여기서 장롱을 옮기는 것은 집안 살림의 중요한 상징을 이동하는 것인 만큼 소중하게 인식되기 마련이었다.

   원래 안방의 주인은 그 집의 살림을 도맡아하는 주부였다. 집안 살림살이 가운데서 중요한 것은 밥 짓기, 바느질과 세탁, 아이 기르기, 집안 청소 등이라 하겠다. 이런 일은 잘하는 여인에게는 부덕婦德을 갖추었다든지 솜씨가 좋다는 평가가 따라다녔다. 가사활동 가운데 장롱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은 바느질이었다. 우리 옷은 해체하여 세탁하고, 다시 다듬이질과 바느질을 하여 재조합한 후 다림질을 하여 입는 것이었다. 또 직물을 직조하거나 옷을 짓기 위해 마름하는 것도 여성의 몫이었다. 그리하여 실패, 골무, 가위, 바늘, 인두, 베자布尺, 금박판, 베저울, 옷본, 버선본 등과 같은 바느질 도구와 직조용 물품의 일부가 반짇고리에 담긴 채, 혹은 그 자체로 장롱 속에 보관되기도 했다.

   여인들은 몸을 꾸미는 것을 가치 있게 여겨서, 화장을 하거나 패물로 장식을 하는 때가 종종 있었다. 이러한 패물을 넣은 보석함이나 작은 경대 같은 것도 장롱 속에 넣어두기도 했다. 물론 문갑이 있는 집이라면, 보석함을 문갑 속에 넣어두고, 경대는 그 위에 두고 사용하기도 했다. 그리고 양반가의 여성들은 글재주도 있어서 화전花煎놀이와 같이 특별한 행사를 하는 날이면 가사歌辭를 지어서 읊조린 전통이 있었다. 반촌일수록 이런 두루마리 가사집이 한 집에서도 몇 권씩 나오는데, 그런 두루마기는 대개 장롱 속에 보관되어 왔다.

   한편 사랑방에는 의걸이장을 두는 것을 이상적으로 여겼다. 우리 옷은 입체형이 아니라 평면형이기 때문에, 잘 개어서 층층이 쌓아서 장롱 속에 보관한다. 그런데 외출이 잦은 가장이 평소에 입는 옷조차 이렇게 보관한다면 불편할 수밖에 없다. 이런 불편을 덜기 위해서 옷을 걸어서 보관하도록 고안된 옷장이 의걸이장이었다. 의걸이장이 있는 집은 그래도 사회적 교류의 폭이 넓거나 부유한 집이었다. 이런 의걸이장이 없는 집에서는 다른 방식으로 외출복을 보관하여 왔다.

   의걸이장이 없으면 외출용 두루마기를 접어서 농에 두거나 벽에 그대로 걸어 두었다. 그래서 안동의 어떤 마을에서는 장날 가장이 입고 나온 두루마기에 대하여 농치기’, ‘벽치기라는 말로 구분하고 있었다. ‘농치기는 접어서 농에 넣어두었다가 다리지 못하여 접히 자국이 남아 있는 두루마기를 가리키고, ‘벽치기는 벽에 걸어두어서 보기 싫은 주름이나 접힌 자국은 없는 두리마기를 가리킨다. 이런 유별적 표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어른들이 외출복의 상태에 대하여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를 알 수 있다. 의걸이장이 있으면 그 보다 더 간편하게 옷을 보관할 수 있었다. 따라서 손님이 자주 찾아오는 집, 가장의 외출이 잦은 집에서는 그만큼 의걸이장의 필요성이 컸다고 할 것이다.

 


 

 

 

단아함과 화려함의 미학

- 장석에 나타난 문양의 상징적 의미

 

김지희

대구가톨릭대학교 명예교수

 

   【裝飾이란 말과 병행하여 裝錫이라 명하기도 하지만 이것은 재료의 특성이나 시각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장식의 특성 중 가장 중요한 것인 목가구의 기능성과 견고성을 무시한 명칭이기 때문에 달리 적절한 용어가 요구된다.

   최초에는 목재만으로 구성된 가구가 생겨나면서 문이 필요하게 되자 목재 자체에서 문짝에 돌출부위를 만들고 문틀에 구멍을 뚫어 목재 자체에서 촉과 혈을 만들어 끼워 사용했으나(지금도 부엌문은 이렇게 사용하는 시골도 있다.) 차차 기능적 요소의 장식이 요구되었을 것이다(물론 부엌문같이 경첩없어도 문의 기능을 할 수 있는 것도 있다.) 기능적 장식의 종류로는 우선 여닫이문의 편의성을 위한 돌쩌귀 (암수 두 개의 쇠붙이로 구성)가 발생하면서 경첩으로 발전되었을 것이고 빼닫이의 고리, 들쇠 등이 그 기능적 요소일 것이다.

   가구를 보호하는 요소를 살펴보자. 목가구의 결구를 튼튼히 하여 수명을 연장함을 목적으로 가로목과 세로목의 이음 부분의 귀장석, 앞널과 옆널의 결구를 위한 거멀쇠 장식 목구의 교차점에 튼실한 힘을 유지하기 위한 세발장식, 문의 중심부위에 자물쇠로부터 충격을 방지하고 자물쇠의 시근장치를 더욱 튼튼히 하는 앞바탕 장식, 개폐되는 목구와 고정된 목구의 뒤틀림을 막아주는 뻗침대, 목구의 충격과 부딪침의 부위나 연결 부위를 고정시키는 광두정(큰머리못), 시각적 요소로서의 미감을 위한 다양한 길상적 요소의 문양과 적절한 쇠붙이의 선택(, , 주석, 황동)이 필요하면서 유교적 요소의 가르침이나 교훈적 행위 실천을 위한 직접적 문자나 상징적 동, 식물이 표현되면서 인간의 욕구까지 은유적으로 나타난다.

   조선 목가구에서 장식은 결구된 나무의 재질이나 형태에 따라 못 하나에도 짧은 못, 긴 못, 가는 못, 굵은 못이 있고, 철저히 계산에 맞춰 제작을 했으나 목재가 해결하지 못하는 부분을 장석의 특성을 잘 이해하여 응용한 것이 역력하다. 따라서 장인은 자연의 섭리를 목재의 특징에 맞추어 순응하였고, 장석은 장인의 고집을 목재에 배합하여 자연의 힘을 꺾어 놓았다. 예를 들어 소나무나 오동, 피나무는 살이 무르고 두텁게 켜기에 반닫이나 책궤 같은 목부로 사용되지만 못을 칠 땐 굵고 긴 것은 단순하게 처리하고 안방가구에는 섬세한 무늬를 감상하고 결구가 복잡한 부위에 얕고 가는 못을 사용하여 못으로 인한 터짐을 방지하기 위하여 많은 못을 치지 않기 위한 장식을 붙이기도 하였다. 이 모든 것이 장식의 앞바탕이나 거멀쇠, 광두정, 경첩, 들쇠, 각종 귀장식까지도 과학적으로 계산된 그 속에서 미감을 최대한 살려 장식하였다.

   또한 목가구가 지방적 특성을 잘 나타내듯 장식 또한 지방색을 구분하는 가장 두드러진 방법이며 사대부가나 민가, 천민들의 소유물에 따라 현저한 차이를 보이지만 빈부를 떠난 저마다의 멋과 맛을 잃지 않았다.

   장식철물의 종류를 살펴보면 철-주석-백통 등의 순위가 대충 나타난다. 이것은 철로만 구성된 장식에서 동이 등장하면서 동에 아연을 혼합하여 주석을 만들다가 19세기 후반부터 니켈이 등장(수입)하면서 동에 니켈을 혼합하여 백통이 일반적으로 분포된 듯하다. 하지만 목가구의 사용용도의 특성에 가급적 맞추고 비철금속의 고가高價임을 감안하여 부첰가구는 철(무쇠), 안방가구는 백통, 주석을 많이 사용하였다. 사랑방가구는 혼란한 색상을 배체한 주석 또는 철만을 고집한 듯하다.

   문양을 살펴보면 처음엔 목재의 결구형식으로 시작하다 19세기부터 그 문양의 형태가 복합적 요소로 언뜻 구분하기 어려운 문양으로 변모한다. 따라서 실패문 장석만 분석하여도 단순한 실패가 아닌 쌍버선형, 불로초형, 제비초리형, 원앙새형 등으로 정확한 구상물이 될 수 없는 복합형상물임에, 특별한 이름을 부여하기엔 대체로 애매한 사항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부, , 다산, 출세, 공명, 평안, 부부금실 등의 원래의 목적은 하나인 것이다.

   장석은 17~18세기의 단순함에서 차차 복잡한 문양의 양상을 띠게 된다. 그러나 기능적 요소가 배제된 완전한 장식으로만 표현된 문양이 19세기 후기부터 나타나는데 이는 그 형태가 구체성을 가진다. 예를 들면 거북, , 호랑이, 봉황, 사슴, 원앙 등의 동물과 포도, 모란, 분재, 매화, 국화, 난 등의 회화적 관점으로 표현하였다. 또한 무양의 표현기법으로는 양각, 음각, 투각, 부조浮彫, 타출打出 등 다양하게 하면서 주석에 구리를, 황동이나 철에 상감하기도 하였다.

 

   장석과 같이 장착물로서의 자물쇠 역시 선형 자물쇠와 북통형, 은혈자물쇠가 있다. 하지만 부착형은 아니지만 단독적 역할의 ㄷ자형, 원통형 수박형과 용두나 잉어, 거북 등의 형물형의 자물쇠 역시 그 기능적 역할도 중요했지만 전체 장석에 조화롭게, 견실하게 부착하여 안정감과 안도감을 해결하였다. 특히 자물쇠에 은입사나 타출무늬를 새겨 넣어 주된 염원을 표출하기도 하였다.


 



 

장롱의 장식화에 표현된

아름다운 마음씨

 

이경숙

대구보건대학 겸임교수


 

   콩기름 먹인 노란 빛깔의 윤기 나는 바닥위에 단아하게 화초장이 놓여 있었다. 아랫목을 찾아 방바닥에 얼굴과 몸을 바짝 붙이고 추위를 녹일 때 햇살 한줌이 장롱에 부서지면서 화초장의 나비를 불러내고, 여치를 뛰놀게 하고, 징그럽게만 여겨지던 박쥐를 날게 하던 꿈같은 그런 기억이 있다. 혼자의 생각에 지쳐 잠시 잠이 들었는가 보다. 좀 전에 보았던 장롱에 장식된 풀꽃들의 향기가 방안 가득하다고 생각 했을 때 코끝으로 저녁밥을 짓는 솔가지의 매캐한 연기가 방바닥으로 스며들었다. 할머니가 부르는 소리에 잠은 깼고 어스름 속에 놓인 화초장의 나비는 더 이상 날지도 않고, 꽃은 향기를 품지도 않은 채 덩그렇게 놓여있었던 그런 오랜 기억의 공간이 장롱에 있다.

   장롱에 표현된 회화성은 나무 자체의 아름다움이나 경첩의 실용적인 포치 및 미적 상징성과 함께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선인들의 마음의 향기를 머금고 우리 곁에 다가온다. 무엇이었을까? 정갈하게 다듬고 선을 넣어 만든 장롱의 장식화 속에 숨겨진 그 은밀한 마음들이 소망했던 것은.

 

 

   무엇을 사랑하였을까

 

   장롱의 공간성은 실용성을 목적으로 하지만 넓은 의미에서 장롱의 평면은 실용성을 넘어선 심미적, 상징적 성격의 회화 공간이다. 장석의 배치와 나무의 결, 목칠의 섬세함, 문자와 그림 등의 종합적인 설치 작품은 셈이다. 하지만 좁은 의미에서 장롱에 나타난 회화적 공간은 주로 장롱의 문에 표현되어 있다. 장롱의 장식화 기법으로는 나무에 직접 새기거나, 나전으로 상감하거나 유리의 뒷면에 채색한 기법, 지장을 만들어 그리거나 오려 붙이는 기법 등 다양하다.

   오른쪽의 장식화는 옻칠한 나무의 표면에 바로 깊고 얕게 새기었다. 꽃과 나비의 표현에서 사물의 형태를 단순화하고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해 단축을 피한 표현이 보인다. 굵고 깊게 새긴 가지는 해묵은 매화나무 가지처럼 보인다. 하지만 아직 어린 잎 사이로 매화꽃 뿐 아니라 아름답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어느 해 봄이건 봄날에는 겨우내 나뭇가지 속에 숨어 있던 파릇한 푸른 잎과 여린 꽃을 만날 수 있었던 것처럼.

   이러한 장롱의 장식화는 여인네들의 미감을 잘 반영하고 있다. 특히 19세기 후반의 장롱에는 이러한 회화성이 두드러진 특징으로 나타난다.

   조선시대 후기의 민화의 세계가 추구하였던 것은 부귀, 다남, 장수, 출세, 부부화합의 상징성이 도식화된 세계였다. 하지만 장롱에 표현된 회화의 세계는 민화와는 또 다른 세계관을 보여준다. 즉 자연의 모습에서 느껴지는 순수한 아름다움과 교훈을 내면화시켜 표현하고 있다. 그것은 어쩌면 자연으로 대치되어 표현된 그들의 생활철학이었고 그들이 사랑한 삶의 모습들이었다. 그네들은 알을 낳기 위해 열심히 쇠똥을 굴려가는 쇠똥구리와 날개를 활짝 편 부지런한 꿀벌들의 모습에서 볼 수 있는 삶의 교훈도 놓치지 않았다. 장식화속에는 아지랑이가 금방이라도 피어오를 듯 사랑스러운 봄날의 풍경이 있다. 노랗게 핀 민들레와 잘 어우러진 자연의 소박한 풍경 속에 담긴 의미들을 민화 속의 많은 기원보다 더 가치 있는 것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작고 소박한 자연의 풍경에서 건져 올린 철학으로 생활의 씨줄과 날줄을 엮을 줄 알았던 여인들의 고운 마음이 장롱 가득 수 놓여 있다. 그래서 장롱의 장식화는 바라보는 이로 하여금 잔잔한 행복을 준다. 욕심을 내지 않는 마음, 작은 것의 소중함과 아름다움을 사랑할 줄 알았던 우리 어머니였던 여인들의 마음을 장롱의 장식화에서 본다. 그래서 장롱에는 아직도 따뜻한 온기가 남아 있다.

   아래의 그림은 아름다운 향으로 선비의 사랑을 받았던 난을 여치와 함께 표현하고 있다. 문인화의 세계에서 고고한 선비의 인품을 대신하던 난은 안방의 장롱에서는 여치의 그네가 되었다. 난의 휘늘어진 가지 위에서 아슬 아슬 그네를 타는 여치와 활짝 날개를 펼쳐든 채 날아오른 여치는 현실적 생동감을 노래한다. 장롱의 장식화에 나타난 독특한 미감을 이처럼 자연의 서정과 선비의 아취를 현실적인 생동감으로 표현해낸 것에 있다. 꽃에서는 주와 종을 이루어 조화와 질서를, 짝을 이룬 여치에서는 함께 하는 화합의 슬기로움을 표현하였다.

 

 

무엇을 표현했을까

 

   장롱에 있어서 회화성의 적극적인 표현은 가구의 표면에 변화를 가져 왔다. 가구의 표면에 직접 자개로 상감象嵌하거나 각을 하여 표현하는 방식에서 보다 자유로운 회화성의 표현이 시도되었다. 그리고 지장紙欌을 만들어 그 위에 그림을 그리거나 종이 장식을 오려 붙이는 방식 등과 함께 유리 채색화가 나타났다. 그러므로 시기적으로 상감과 각을 하였던 방식에 비해 후기의 방식이다. 유리에 채색한 그림은 상감하거나 각을 한 장식화에 비해 붓의 활달한 필치와 색채의 화려함을 좀 더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었다. 시대적으로 새로운 재료인 유리와 거울 등에 대한 경외와 호기심도 이러한 장롱 장식화의 회화성에 기여하였다고 볼 수 있다. 주로 경기도 장롱에 이런 유형의 장롱이 많이 보인다. 이러한 유리 채색화의 경우 민화적 성격이 더욱 강하게 부각되는 것이 특징이다. 부부화합을 기원하는 한 쌍 의 새, 장수를 기원하는 학, 거북이, 영지버섯, 바위 등이 그려지거나 까지 호랑이 등의 모습은 민화적 세계관이 그대로 드러난 부분이다. 그러나 민화에 비해 채색의 명료성과 형태의 단순성이 돋보인다. 또 다른 점으로는 희나 복처럼 문자도 그림의 일부분으로 자리 잡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민화의 문자도의 주제가 되는 유교적인 덕묵(, , , , , , , )과는 다른 관념인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표현에서 장롱의 장식화는 민화적 세계관과는 차별된 여인들의 소박한 소망을 담아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오른쪽의 그림에서 구름은 장식적으로 베풀어져 있으며, 신기神氣를 품어내고 있는 거북이에서도 서로 조응하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거북이 등의 껍질표현도 각기 다른 문양의 채색하여 변화를 모색하였다. 단순하고 명료한 오채를 기본으로 한 장롱의 회화성은 옻칠을 하거나 주칠을 한 장롱의 강하고 어두운 바탕과 어울려 민화보다 더 강한 장식성으로 안방을 치장하였다. 꽃들은 화려하고 풍성하게 표현되고 있으며 암수의 새는 좁은 화면에서도 눈길을 마주보는 포치를 하여 따뜻한 시선을 그려내고 있다. 이처럼 장롱의 표면은 장식화와 장석들의 포치가 하나로 어울려 생의 간절한 기원과 밝고 화사한 삶의 기쁨을 생동감 있게 노래하는 공간이었다.

 

 

무엇을 꿈꾸었을까

 

   살펴본 바와 같이 장롱의 장식화에 나타난 회화의 세계는 민화적 세계관과는 구별되는 자연주의적 서정의 울림이 있다. 그것은 장롱을 주로 사용하고 요구하는 층이 여인들이라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 민화의 유행과 장롱의 장식화의 유행이 궤를 함께 하고 있으므로 민화의 상징성과 유관한 상징체계를 살펴보면 몇 가지로 구별된다. 즉 벽사와 기상의 상징적 의미로 크게 나누어진다. 길상吉祥적인 내용으로는 부부화합을 기원하는 내용이 가장 많이 보인다. 마주보는 한 쌍의 새를 매화나무 가지나 모란꽃과 함께 표현하거나 나비 그림 등이 이러한 예이다. 나비는 행복과 즐거움, 자유연애의 상징으로 동양에서는 장자의 호접몽에서 연유하여 남녀 화합의 상징으로 여긴다. 꿈속에서 나비가 되어 화궁 속으로 날아다니며 달콤한 꿀을 빨아 먹으면서 열매를 수정하고 즐거움을 만끽하는 까닭에 나비는 즐거움의 상징이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넝쿨과 함께 표현된 나비는 자손번창의 기원과 장수의 의미를 담고 있다. 장식화에 표현된 잠자리와 매미는 애벌레에서 껍질을 벗과 태어나므로 현실세계에서의 입신출세를 기원함과 동시에 죽음의 세계에서 환생을 염원한다. 예로부터 죽은 이의 입안에 옥으로 만든 매미를 넣음으로써 환생을 비는 습속이 있었다. 이처럼 장롱에서는 현실에서의 생의 기쁨과 죽음의 세계에서의 생을 바라는 가장 근원적인 소망을 표현하고 있다. 자주 등장하는 오리 역시 부부화합의 상징으로 버드나무 아래 혹은 연지 안을 거니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또 염소가 넝쿨진 포도나무아래에서 열매를 따고 있는 모습은 자손만대의 번창을 기원하는 길상적 의미이다. 그림에 나타난 두꺼비, 개구리 등의 파충류들은 자연의 서정성을 표현하고 있기도 하지만 벽사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두꺼비, , 전갈, 지네, 도마뱀 등은 오독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러한 파충류들의 상징물을 부적처럼 지니고 있으면 악마를 물리칠 수 있다고 믿어졌다. 한편으로는 탈속의 경지를 노래한 신선사상의 내용도 장식화에 보인다. 산산사호도商山四皓圖가 이러한 예이다. 이 그림은 한 고조때 난세를 피하여 상산에 숨어살며 임금이 불러도 벼슬자리에 나아가지 않았던 동원공東園公, 하황공夏黃公, 각리선생角里先生, 기리계綺里季 네 사람이 바둑을 두는 그림이다. 명리를 탐하지 않았던 탈속한 선비의 모습을 교훈적으로 표현하였다. 그리고 장롱의 장식화에는 드물게 염소를 표현한 것이 있다. 한가로운 들녘의 한때에 풀을 뜯고 있는 염소가 무슨 일인지 가득 향기를 머금은 채 둥글게 말아 올린 탐스러운 꽃의 향기에 취해 있다.

   꽃과 꽃잎이 생태적으로 맞지 않는 이러한 표현법에서 우리는 속살스럽게 구체성을 밝히지 않던 장인의 마음을 본다. 사물을 정확하게 옮기지 않았으나 전달하려는 이미지를 시각적으로 분명하게 전하는 마술이 여기에 있다. 둥글다는 이미지만큼 탐스러운 것은 없다. 둥근 보름달, 둥근 어머니의 젖무덤, 그래서 이 그림의 꽃은 꽃잎을 가득 둥글게 말아 올려 부풀린 풍선처럼 탐스럽다. 꽃이 향기를 가득 머금고 있는 느낌을 표현해 내고픈 장인의 마음이 숨어 있다. 향기를 느낀 한 마리의 염소는 목을 쭉 내민 채 꽃 가까이 얼굴을 내밀고 있다. 뒤에 선 양은 향기에 잠시 주춤 서 있는 모습이다. 두 마리의 양을 화면에 포치하면서 몸을 내밀고, 멈춘 각기 다른 모습을 통하여 화면 속에 고요와 동세를 함께 아우르는 조화를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장롱의 장식화에는 다양한 길상적인 상징과 벽사의 의미, 탈속의 경계가 여인들의 자연주의적 서정과 함께 표현되어 있다. 모란과 연꽃, 패랭이꽃, 민들레, 매미, 나비, 소나무와 학, 잠자리, 여뀌 풀, 봉황과 오동나무 등 자연의 모든 표정들이 오롯이 담겨진 장롱의 장식화에서 우리는 노란 국화차 한잔의 향긋하고 소슬한 향과 주름 가득한 할머니의 살내음을 느낄 수 있다. 소박해서 더욱 아름다운 마음씨, 따뜻하고 까칠한 할머니의 손을 마주잡고 싶은 간절함을 장롱의 숨결에서 느낀다.

 


 

 

한점 흐트러짐 없는 선비의 정신

- 의걸이 장롱에 새긴 경구들

 

이갑규

대구대학교 겸임교수

 

   문화는 복합적이면서 여러 방면으로 관련되어 특성을 지녔다는 얘기를 한다. 한학을 전공한 필자로서 우리의 장롱에 새겨진 한문 문구를 고찰해 볼 기회를 가지면서 문화의 그러한 특성을 새삼 느껴볼 수 있었다. 장롱에는 목공예만 있었던 게 아니었다. 일상화된 한문 문화도 깃들어 있었던 것이다.

   안방 장롱에는 만자 모양, 쌍희자雙喜字 문양 등의 장석만으로 표현된 경우도 있지만, , , , 문양의 장석이라든지 부, , , 문양의 장석 등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전통 사회에서는 다산多産을 기원하였기에 그러한 혼이 장롱에까지 스며 녹아있고, 또한 인간의 수명과 부귀영화 등을 가장 많이 기원하였기에 장롱마다 으레 이러한 염원이 표현되어 있다. 명시구名詩句를 새겨 넣기도 하고 부귀를 상징하는 모란 등의 그림을 그려 넣기도 했으며 장수를 상징하는 십장생 등을 선택하여 그려 넣기도 하였다.

   하지만 사랑방 혹은 서재에 놓인 장롱은 이와는 달랐다. 조선시대에는 유교 문화가 꽃피워 졌고 유교문화 중에서도 중국 송나라 때 집대성된 성리학性理學이 사상의 주류였다. 성리학이란 인성人性과 천리天理를 연구하는 학문으로, 다시 말해 인간성의 회복과 저연의 이치에 합일하려는 사상이었다. 그러므로 성리학에 참된 공부를 이룬 선비들은 검소한 생활과 담백한 문화를 즐겼으며 이러한 선비의 훌륭한 문화는 일반 대중문화의 깃발이 되어 그 시대의 주류문화로 자리 잡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채에 놓이는 가구는 안방의 가구와는 달리 격언格言이나 경구警句를 중심으로 새겨 넣었거나 시중유화詩中有畵란 말과 같이 시속에서 그림을 연상케 하는 그런 문구들이 대부분이었다.

 

 

   격언 경구가 새겨진 장롱

 

   君子以自强不息군자이자강불식

   吉人能主善爲師길인능주선위사

   군자는 늘 스스로 힘쓰기를 쉼 없이 하고,

   길인은 능히 선을 주로 하여 스승을 삼는다.

 

   군자와 길인으로 대구對句를 이루고 있는 이 칠언단구에서 자강불식自强不息이란 말은 역의 건괘乾卦 상사象辭이기도 하거니와 공자孔子의 손자인 자사子思가 중용中庸에서 설명한 말이기도 하다. 천도天道는 지극히 진실되어 운행함에 쉼이 없듯至誠無息, 사람도 자신을 닦음에 힘써 가기를 쉼이 없어야 군자이다 라는 경구이다. 그리고 주선위사主善爲師는 서경書經 함유일덕咸有一德 편에서 상나라 재상 이윤伊尹이 사직하고 떠나면서 임금 태갑太甲이 혹시라도 덕은 떳떳한 스승이 없어서 마음에 선을 주장함이 스승이 된다고 한 것이다. 또한 서경書經에서는 길인이 선을 행함에 세월이 부족하고吉人爲善 惟日不足, 악인이 악을 행함에 세월이 부족하다惡人爲善 惟日不足라고 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위의 시구詩句들은 본심을 바로세워 한 점 흐트러짐 없는 이지적인 선비의 마음을 표방한 좌우명이요 경구警句이다. 이러한 구도자적인 분위기가 매우 엄숙한 분위기를 새겼구나 싶어쓴데 좌측에 대면한 시구에서 마음을 활짝 풀어 주었다.

 

   人道君如雲裡鶴인도군여운리학

   自稱臣是酒中仙자칭신시주중선

   사람들은 그대를 구름 속으로 나는 학과 같다고 말하더군요,

   이태백은 스스로 은 술 속에 신선이옵니다.’라고 말했네.

 

   예기禮記에 일장일이一張一弛란 말이 있다. ‘한번 조여주면 한번 풀어준다는 뜻이다. 사람의 마음은 조여서만도 안되고 풀어놓기만 해서는 더욱 안 되는 것이다. 조이고 푸는 것을 마치 활을 다루듯 해야 한다고 했다. 활은 계속 조이기만 하면 터져 버리고 계속 풀어놓기만 하면 뼈드러져 버리는 속성이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봤을 때, 우측의 시구는 정신을 바짝 조이는 선비의 구도적 정신이라 할 수 있고 좌측 시구는 이태백의 고사로 한바탕 박장대소를 짓게 함으로써 절묘한 대립을 이루어 놓았다. 좌측 시구를 부연하여 풀어보면 이러하다.

   당현종玄宗이 양귀비楊貴妃와 흥경궁興慶宮 침향정沈香亭에서 놀 때였다. 마침 모란꽃은 만발하고 양귀비도 따르건만 음악만 옛 가사라고 하여 당시 한림학사翰林學士로 봉직하던 시인詩人 이태백李太白을 불러 청평조淸平調란 악보에 새 가사를 지어넣게 하였다. 그러나 이태백은 어용시御用詩를 짓지 않으려고 장안의 술집에서 만취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현종의 명을 받고 달려온 고력사苦力士에게 업혀 흥경궁에 도착한 이태백은 현종을 대할 수 밖에 없었고 현종은 그 자리에서 그대는 구름 속 학이라고 예찬하였다. 그러나 이태백은 학이 아니라 신은 주중선御中仙으로 술 속의 신선이라고 호탕하게 답했으니 웃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러한 고사를 당나라 시인 두보는 음중팔선가飮中八仙歌에서 이렇게 읊었던 것이다. 아래쪽에 받혀주고 있는 문구는 자연의 풍경을 더욱 여유롭게 읋었다.

 

   化間酒氣春風화간주기춘풍

   遠楊柳細枝黃원양류세지황

   꽃가지 사이에서 술 기운 무르익으니 봄바람 일고.

   멀리 버들나무 가는 가지엔 노란 망울 터져 나오네.

 

   음양陰陽관계로 말한다면 아래쪽에 새겨진 시구는 부드러운 음을 상징하는 시구라 하겠고 위쪽에 새겨진 시구는 강한 양을 상징하는 시구로서 상하좌우의 조화를 이루었다 라고 하겠다. 또 다른 장롱의 시구도 역시 좌우와 상하의 조화가 이루어져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鮮言極樂有天上선언극락유천상

   僊設蓬萊在海中선설봉래재해중

   야소씨는 극락이 천상에 있다고만 말하고,

   신선들은 봉래산이 바다 속에 있다고만 말하네.

 

   내 앉은 자리가 복되고 바르면 여기가 곧 극락이요 신선이 사는 봉래산이지 어찌 현실과 내 앉은 자리에서 이루지 못한 것을 별도의 이상세계에서 신선을 찾고 극락과 봉래산을 찾으려고 하는 허황된 꿈을 갖는가 라고 준엄하게 경고하는 좌우명이다. 유교의 사상은 철저한 현실을 바탕으로 도를 구하는 것이고 진정 극락과 봉래가 있다면 현실에서 마음을 닦아 이루었을 때 만이 가능한 것이다. 현실을 외면한 채 별다른 세계를 찾아 행복을 추구함은 현실의 도피이며 이기적인 자신만의 행복에 집착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좌측의 시구에서 또한 마음을 활짝 열어 주었다.

 

   維有千秋夫子道 (유유천추부자도)

   人間到處盡春風 (인간도처진춘풍)

   오직 천년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은 공자의 도 있어,

   인간세계 도처마다 온화한 봄바람 불어오는 구나.

 

   선비는 하나의 사상으로만 가지 이치를 일관한다. 그것이 유교의 사상이고 그 유교의 사상이 천하에 가득 둘려져있을 때 봄이 오지 않아도 인류의 가슴에는 봄바람처럼 따스한 기운이 돌 것이라고 읊은 것이다. 그리고 하단에 단조로운 쌍희자雙喜字를 좌우로 받u 줌으로써 메시지를 던져주는 기상이 늠름하게 보이도록 하였다.

   대체적으로 아쉬운 점은 문장과 서법에 있어서 장인들이 주관적으로 취한 것이기에 전문 감식안을 못 갖추고 하나의 견본으로 전사하고 모각模刻하는 과정에서 오류를 면치 못한 점이 있고 서법에서는 필의筆意가 살아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백옥에 박힌 옥티는 오히려 갈아낼 수 있다라고 했듯이 장인의 훌륭한 목공예에 문장이나 서법까지 완벽을 기대한다는 건 과욕일 것이다.

   이러한 의걸이장 앞에 앉아 있었던 선비는 과연 어떤 분이었을까! 본래 그 물건은 그 사람과 같은 것이다. 어떠한 물건이 어떠한 위치에 어떻게 놓였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마음가짐과 생활 자세를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고인들의 향기와 정신을 이 장롱을 통해서도 그 숨결을 느낄 수 있기에 더욱 귀한 것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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