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전시

2026년은 한불 수교 140주년을 맞이하는 해입니다. 대구보건대학교 인당뮤지엄은 프랑스의 원화·판화전문미술관인 그라블린미술관(Musée du dessin et de l’estampe originale - Gravelines)과 함께 한국현대판화를 조명하는 전시를 공동으로 추진합니다. 그라블린미술관에서 오는 6월 28일부터 11월 3일까지 판화가 20여 명, 작품 100여 점을 K Print Korean Woodblocks 전시를 통해 한국 판화의 세계를 유럽에 소개할 것입니다. 이 전시를 공동 기획하는 인당뮤지엄은 이에 앞서 4월 1일부터 5월 23일까지 한국현대판화를 조명하는《꽃이 피고, 바람이 분다》를 대구보건대학교 인당뮤지엄에서 개최합니다. 두 전시는 연결된 전시이며, 내용과 형식은 각 미술관의 공간적 특성에 맞게 조정됩니다.
인당뮤지엄의 전시는 한국 판화의 굵은 줄기를 따라가되 현재성에 주목하고 한국 판화의 내용적 형식적 특성을 4개의 영역으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합니다. 판화의 본질적 특성을 재료와 기법, 역사와 전통의 맥락에서 이해하고, 판화 고유의 특성인 복제성과 대중성을 바탕으로 사회정치적인 메시지를 견인하던 시기, 자연의 미감을 중시하는 한국의 고유한 문화적 특성이 드러나는 작품, 도시와 일상에 주목하는 현재의 흐름까지를 짚어보고자 합니다. 그래서 '일상_나무와 칼', '역사_흐르는 강물처럼', '서정_시처럼 바람처럼', '도시_여기 지금' 등 4개의 영역으로 구분하고 12명의 작가 작품 130여 점을 전시합니다. 이를 통해 판화, 특히 목판화가 지닌 감성을 이해하고, 오늘날 매체 연구와 형식 모색을 통한 확장의 가능성까지를 주목합니다.
전시의 제명인 《꽃이 피고, 바람이 분다》는 자연의 섭리와 순환을 의미합니다. 꽃이 흐드러지게 핀 4월의 어느 봄날, 애꿎은 바람이 불어 꽃잎을 떨어트립니다. 흩날리던 꽃잎은 바닥에 내려앉고 뒹굽니다. 이내 비가 오고 나뭇가지에는 새순이 파릇파릇 돋아납니다. 꽃을 피운 나무는 한 뼘 더 자라납니다. 한국의 판화는 역사와 함께 강물처럼 흐르고 시처럼 바람처럼 우리 곁에 있습니다.
김서울(1983~)은 에칭과 실크스크린 기법을 주로 활용하여 세밀한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어떠한 매체와 전시방법을 차용하더라도 늘 등장하는 주제는 현대인의 일상임은 틀림없다. 최근 〈My Greeny〉에서는 반려 식물, 이 또한 현대 도시인의 일상 단편일 수도 있겠다. 에칭이 부식에 따른 시간의 층위를 적층하는 것이라면, 실크스크린은 면을 쌓아 올린 것이다. 실크스크린 기법을 활용하는 작품의 경우, 그 위에 올린 색의 수만큼 실크스크린을 찍었음을 나타낸다. 노동집약적인 그의 작업은 에칭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어느 하나 허투루 넘어가지 않고, 하나부터 열까지 그의 손에 의해 이루어진다.
김성수(1958~)는 나무를 툭툭 쳐내고, 칼로 다듬고, 색을 입히는 조각을 한다. 작가의 손맛으로 나무 둥지는 인물이 되고, 꽃이 되고, 다시 나무가 된다.〈꽃과 새가 하는 말을 들을 수 있다면〉과 〈새를 타는 사람〉 등의 주제로 대표작 10여 점을 내보인다. 작가는 2000년대 초반 ‘꼭두’를 모티브로 목조각을 시작하였다. 꼭두는 장례식에 사용되는 상여를 장식하는 나무 조각상을 일컫는데 사람, 동물, 식물의 형상 등 다양한 모양새를 가지며 제각각의 역할로 망자의 넋을 달래고 이승의 여한을 모두 잊고 편안한 사후를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여기에서 꼭두는 세상과 세상을 잇는 위로이자 치유이다. 또한, 〈꽃과 새가 하는 말을 들을 수 있다면〉은 소설 『희랍인 조르바』의 주인공, 조르바의 말을 차용하였다. 자유분방한 정신을 닮고 싶은 마음을 담았다.
김억(1956~)은 대학에서 동양화를 전공하였다. 그의 칼은 붓보다 더 섬세하게 역사와 삶의 공간인 이 땅을 목판화로 기록한다. 발로 답사한 장소를 부감의 시점으로 조망하듯 펼쳐 보이는 것이 김억 판화의 특징이다. 그의 발이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순례하듯 국토를 누빈다. 이번 전시에는 횡권족자 형식의 길이 438cm에 이르는〈도산구곡〉과 낱장 9장으로 새긴〈무흘구곡〉을 전시한다.
도산구곡은 안동 도산서원을 중심으로 낙동강을 따라 펼쳐진 아홉 군데 경승지를 가리킨다. 곡(曲)이라는 표현은 물줄기를 따라 형성된 골짜기를 끼고 있는 의미이다. 한눈에 담기 어려운 이 풍경을 그는 체화하여 칼로 새겼다. 작가는 발로 걸으며 역사의 장소와 현재 삶의 공간을 연결한다. 도산구곡의 골짜기에 비닐하우스도 보이고, 무흘구곡에서 축구 경기를 하는 사람도 보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역사가 숨 쉬는 땅의 장소성을 현재의 시점에서 소환한다.
김우조(1923~2010)는 계성학교에서 서진달로부터 미술 수업을 받았다. 이 당시 함께 조형의 기초를 배운 동료로 김창락, 변종하, 추연근, 백태호 등이 있었다. 1941년 계성학교 재학 중 제20회 ‘조선미술전람회’에 동료 추연근을 모델로〈그림책을 읽는 소년〉을 출품하여 입선하였다. 졸업 후 청도, 포항, 대구, 왜관, 구미 등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미술 교사로 재직하며 판화의 연구와 창작에 몰두하였다. 경주의〈계림〉, 가창의〈우록 가는 길〉, 구미의〈금오산〉등 지역을 특정한 자연 풍경과 포항〈죽도시장〉, 동네 시장, 뒷골목의 모습 등 일상의 삶의 모습을 포착한 70년대 작품을 전시한다. 작가는 풍경, 인물, 일상 삶의 모습 등을 다루었으며, 판법과 형식에 있어서 목판화와 지판화, 추상과 구상을 넘나들며 다양한 작품을 선보였다. 대구에서 판화라는 말조차 듣기 어려웠던 시절, 그는 판화를 발견하고, 매체를 실험하였으며, 예술로서 평가받도록 하였다.
류연복(1958~)은 1984년 대학을 졸업하며 서울미술공동체를 결성하고 벽화팀을 조직해 벽화운동을 벌였다. 이동식 벽화라 부를 수 있는 걸개그림, 민중 판화 운동을 가장 앞장서 나아간 인물이 바로 작가이다. 최루가스 가득한 80년대와 90년대 전반을 가열하게 보낸 후, 1993년 지금의 경기도 안성 국수봉 자락 밑에 거처를 마련하고 이웃과 교류하며 더 넓어진 지평, 생태와 환경으로 작업을 확장하였다.〈붉은 닭〉은 이곳 집 마당에 함께 사는 수탉을 표현한 것이다.〈대붕역풍비〉와〈고래의 꿈〉은 바람을 거슬러 날아오르는 큰 새와 하늘을 유영하는 고래를 나타낸다.
안정민(1952~)은 실리콘 재질의 얇은 막을 수직으로 걸었다. 내리꽂는 폭포〈가로·세로·깊이-해인(海印) 21~24〉는 기운생동의 대범한 이미지이다. 칼 하나로 나무판 면을 내리꽂아 얻은 판면에 실리콘을 캐스팅하는 실험적 기법이다. 투명 실리콘에 은색 안료를 더해 돋을 면에 바르고 그 위에 한지나 판화지를 사용하는 대신에 전체적으로 실리콘을 예닐곱 차례 덧발라 떠낸 것이 작가만의 독특한‘폭포’이다. 제목 중 해인海印은 불교 용어로‘지혜로 우주 만물을 깨닫는 것’이자 영어 번역에서는 Ocean Print라 적고 있다. 바다‘해’와 새길‘인’이다. 작가의 철학적 사유가 엿보이는 지점이다.
이성자(1918~2009)는 대한민국 근현대미술사를 대표하며 일찍이 세계를 무대로 활동한 화가이자 판화가이다. 1951년 한국을 떠나 파리에서 조형예술을 공부하였고, 유화와 목판화에서 특유의 한국성(韓國性)을 담아냄으로써 파리 화단의 주목을 받았다. 1968년에 프랑스 남부, 투레트에 작업실을 마련하고 여름이면 이곳에 머물며 목판화 작업을 주로 하였는데, 1970년에 제작된 〈La Forêt Enchantée〉(환호하는 숲)는‘나무의 자유 Liberté de l’arbre 시대‘(1963~1972)를 구성하는 모티브들이 특징적으로 어우러진 뛰어난 작품이다. 1991년에 이곳에 새로운 작업실을 짓고, 그 이름을 ‘은하수 La rivière argent’라 하였는데, 반원 모양의 2개의 음과 양으로 구분된 작업실, 그 중‘음’은 판화전용 작업실이었다. 목판화는 이성자 삶과 예술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음을 알 수 있다.
이언정(1987~)은 현대 도시의 이미지와 기억을 재구성해‘상상의 도시’를 그려낸다.‘도시’는 상상하기와 달콤함이 어우러진 독특한 분위기이다. 오밀조밀하게 빈틈없이 도시의 빌딩, 빌딩 사이 기와지붕, 고가도로와 그 위를 달리는 자동차, 전광판 등 도시민에게 익숙한 요소로 구성하여 채웠다. 전광판에 등장하는 토끼 캐릭터는 작가의 창작물이다. 이언정의‘도시’가 상상의 도시임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이토록 평범한 요소들로 채워진 풍경이 낯설다. 그것은 채색의 효과와 더불어 작가의 도시에는 사람이 등장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레고 블록처럼 쌓아 올린 도시의 밀도, 빌딩 숲 사이 비현실적인 기와지붕의 군집, 파스텔 색상의 채색 등은 작가의 개성을 나타낸다.
이윤엽(1966~)은 크고 작은 판화 수십 점을 집합시키고 조합하여 커다란 벽면 전체를 하나의 작품으로 만들었다. 따로 같이 한 점 한 점을 계속 곱씹어 보면, 그 안에는 현실 참여적이며 사회정치적 사건을 담은 장면도 있고, 고양이, 토끼, 새 등이 의인화되거나 그와 반대로 인간은 올빼미형, 기계화된 모양새로 있는 것을 발견한다.〈토끼풀 베러 가는 할머니〉나〈웃는 토끼〉나 존중받을 생명으로 동등하게 바라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다. 판의 크기는 대담하고, 내용은 시사적이며, 시선은 생명을 존중하며 일상을 마주한다.
정승원(1983~)은 독일 브레멘에서 디자인을 전공하였다. 작업실에서 그가 제작한 첫 판화를 보았는데, 2016년 친구들과 스톡홀름을 다녀왔고, 그 여행기를 붉은 단색의 실크스크린으로 16칸 만화처럼 시간의 순서대로 기록하고 있었다.〈브레멘 #1〉,〈브레멘 #2〉,〈브레멘 #3〉은 유학 생활했던 브레멘을 그림 정승원, 글은 아내가 적은 것이다. 잿빛 북독일의 인상을 기록하였다. 내 삶의 기록으로 거듭난 미디어, 일상을 차곡히 쌓아 올린 매체 속에 등장하는 작가, 자전적이다. 그만큼 진정성을 담은 표현이다. 예술과 삶은 일상에서 만난다.
정현(1968~)은 한국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했으나 프랑스 유학을 떠나 어릴 때부터 원했던 미술, 그 중 판화를 익혀 지금은 순수판화가로 활동하고 있다. 그간 체계적인 수련의 과정을 통해 목판화와 파리미술학교(ENSBA)에서 쟝 피에르 팽스만 Jean-Pierre Pincemin 에게 카보런덤 기법을 익혔다. 한지, 판화지 그리고 알루미늄판 등 다양한 매체를 사용하여 찍어내는 실험을 이어오고 있다. 한국의 풍경과 서예 전통을 자유롭게 재해석하는 정현은 에디션이 없는 판화, 유일판으로 자신의 판화 영역을 독창적으로 만들기도 한다. 목판을 새기고, 색을 입히고 찍는다. 다시 다른 색을 입히고 찍는다. 이러한 과정을 반복한다. 새긴 판은 여러 번 사용되지만, 찍어낸 판화는 모두 다르다. 중첩에 따른 ‘변주’가 무한히 가능하다. 꽃은 같아 보여도 다 다르다. 단 하나도 같은 꽃은 없다.
주정이(1944~)는 자신의 작업을“그리기와 지우기의 경계를 모색하는 여정”이라 여긴다. 생각을 정리하고 표현을 절제하는,“그리기의 절제와 사유의 압축”을 예리한 칼끝의 기울기로 조정하며 흑백의 목판을 이어온다. 작가가 흑백만을 고집하는 이유는 흑은 모든 색의 조합이며, 백은 세상의 온갖 빛의 합이기 때문이다. 검박한 칼의 맛을 만난 정제된 소탈한 서정성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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