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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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당 김윤기 박사 기증특별전

  • 전시명:옛과 오늘의 교과서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 전시장소:대구보건대학교 인당박물관
  • 전시기간:2009-05-11 ~ 2009-05-31

 

 

 인당 김윤기 박사 기증특별전  <옛과 오늘의 교과서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朋自遠來 不亦樂乎
 

 

초등학교 시절 - 그 때는 국민학생이라 했었지요.


밥상에서 산수 문제를 풀다가 어머니께 무릎걸음으로 기어가서 도움을 청했더니 “아이구! 소학생 셈본도 아주 어렵구나!” 하십니다.

 

소학생, 셈본이란 말도 우습고 대학을 다니셨단 분이 겨우 초등학교 산수책이 어렵다 하시니 우쭐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어머니께서 소풍을 원족이라 하시고 연습장을 잡기장, 노래를 창가라 하셔도 우리가 새겨들어야 했습니다.


우리 아이들도 그렇더군요. 국어책을 가져오랬더니 읽기, 말하기, 쓰기책을 다 가져왔습니다. 지금은 아이들이 모두 대학에 들어갔으니

 

요즘 초등학생들의 교과서 과목이름들은 또 어떻게 변했을까요?


시대가 바뀔 때마다 말이 바뀌고 같은 말이라도 그 뜻이 달라지기는 하지만 그것을 담은 교과서가 우리에게 주고자 했고 또 가르쳤던

 

가치에는 변함이 없을 듯합니다.


책 한권이 귀해 모두 돌려가며 베끼던 시절과 선배의 헌책을 서로 물려받고자 다툴 때만 해도 참 소중했던 책들이 이젠 넘쳐나는

 

출판물 홍수 속에서 옳은 양식으로 분류되기가 쉽지 않게 되었습니다.


유난히 활자매체에 집착하는 제가 다 읽지도 못하면서 욕심스레 책을 사들인데다가 제 남편 인당 역시 오래되고 잊혀지는 것들에 대한

 

애착으로 한권 두권 모으다보니 그야말로 ‘셈본’에서 ‘잡기장’까지 배우고 실천하면 기쁠 수 밖에 없는 책들이 서가에 가득합니다.

 

책속에 길이 있다하니 그 길 따라 멀리서라도 찾아와 봐주신다면 또 그 아니 즐겁겠습니까!

 

 

                                                                                                                                                 대구보건대학 총장  남 성 희


 

 

 

 

인당 김윤기 박사

 

경북대학교                 농학과(1967~1974, 학사)
대구대학교대학원       지역사회개발학과 (1984~1986, 석사)
경기대학교대학원       체육학과 (1998~2001, 이학박사)

 


         사회활동

 

대구보건전문대학                                  부학장(1982~1988)
학교법인 근영학숙                                 이사장(1984~1987)
KBS 시청자위원회                                 위   원(1985-1987)
대구광역시 북구청 자문위원                    위   원(1986-1988)
대구보건대학                                         학   장(1988-2002)
대구광역시 사회복지협의회                     부회장(1993~1994)
미주한인회 총연합회 명예자문위원회       위   원(1995~1997)
월드컵유치 범국민운동본부                     고   문(1996~1997)
대구경북지역 학장협의회                        부회장(1996~1998)
대구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 유치위원회     위   원(1996-1997)
전문대학 학장협의회                               이   사(1999∼2002)
한국청년지도자연합회 자문위원회            위   원(1999~2002)
사단법인 북구문화원                               이   사(1999~2002)
대구지방검찰청 범죄예방 위원회              위   원(2000~2002)
대구경북지역협의회 운영위원회               위   원(2000-2002)
전국보건계전문대학장협의회                   부회장(2001~2002)
학교법인 영송학원                                  이   사(2001~2005)

학교법인 배영학숙                                  이사장(2002~2005)

(주)홍 성                                                회   장(2005~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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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과서의 발달과 仁堂博物館 소장자료

 

남권희

경북대학교 문헌정보학

 

<目次>

Ⅰ. 머리말

Ⅱ. 조선시대의 교육과 교육자료

1. 교육단계

2. 교육기관

3. 교육자료

Ⅲ. · 현대 교과서 변천과정

1. 개화기

2. 일제강점기

3. 광복 및 정부수립기

 4. 교육과정 적용기

 . 인당박물관 소장 자료

Ⅴ. 맺음말

 

 

Ⅰ. 머리말

 

교육은 사람이 바람직한 삶과 자아를 형성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또 교육을 통해서 가정에서부터 국가에 이르기까지 살아가는데 필요한 사회 규범을 비롯하여 인간관계에 필요한 덕목을 배우게 된다. 이러한 교육의 중요성은 국가가 형성된 이래로 항상 중요시 되어 교육과 문화를 통한 국가의 부흥을 최상으로 여겨왔다. 때문에 고구려의 태학(太學), 고려의 국자감(國子監) 같은 국립 교육기관이 설립되었고, 조선시대에는 성균관(成均館)이 설립되어 국가 중앙에서부터 교육을 통한 문화정치를 지향하였다.

중앙뿐만 아니라 지방에는 서당, 서원, 향교 등이 설립되어 일반인 누구나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되었고, 배우는 자들은 자신의 나이와 교육 수준에 맞는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이 같은 교육기관에서 가르치는 교재는 주로 초학들에게는 한자 학습서와 훈몽서,소학(小學)이 주요 교재로 활용되었고, 나이와 교육의 단계가 올라 갈수록 사서삼경을 비롯한 성리서와 역사, 지리, 시문 등으로 학문의 분야를 넓혀갔다.

1900년 이후에는 근대화로 인해 이전보다 훨씬 많은 교육기관이 설립되고 교육의 열의 또한 높아져 이들을 가르치기 위한 다양한 종류의 교재가 간행되었다. 1910~1945년의 일제 강점기와 6.25를 거치면서도 교육과 교육 자료의 출판은 계속되어 지금까지 여러 차례에 걸친 교육과정 개편이 이루어졌다.

 

 

Ⅱ. 조선시대의 교육과 교육자료

 

1. 교육단계

조선시대 유교적 자아실현을 추구하기 위해 지향한 이상적 인간형은 선비였다. 선비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의 논리에 바탕으로 학자, 관료, 사제의 역할을 아울러 수행하는 권위의 통합체였다. 선비는 사람들이 실현해야 할 이상적 인간형으로서 훌륭한 선비가 되는 것이 훌륭한 인간이 되는 것과 동일한 의미를 가졌다. 이런 관계로 선비들이 공부한 교과의 내용은 인간이 자아실현을 위해서 습득해야 할 보편적인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조선조의 정치·문화를 주도해 온 선비에 대해서소학(小學)에서는 대체로 다음과 같이 4로 구분하여 연령에 따른 교육과 그에 걸 맞는 몸가짐을 강조하였다.

 

1 (출생~9) : 가정에서 초보적인 가르침이 이루어지는 시기이다. 이 시기는 주로 자발적인 학습보다는 부형(父兄)들이 한 가지씩 

                            지도하는 가르침을 위주로 한다.

2 (10~39) : 학관(學館)에 나아가 수학하고,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는 시기이다.

                           · 10세부터 바깥의 스승에게 나아가 배우고, 거기서 거처하며 수동적인 교육의 단계를 벗어나 자발적인 학습이 주가 된다

                             이로써 가동(家童)에서 학동(學童)으로 탈바꿈 하게 된다.

 

                           · 15세에 성동(成童)이 되어 무무인상(武舞人象)을 배우고 활소기와 말타기를 익힌다.

 

                           · 20세에 관례(冠禮)를 행하고 성인이 되어 예를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하며, 문무(文武)를 겸비한 대하(大)

                             춤을 배운다.

 

                           · 30세에 혼례를 하여 가정을 이루고 가장으로 모든 일을 운영하며, 널리 배워서 세상사를 알며 뜻을 모아 벗을 사귄다.

 

3 (40~69) : 벼슬하여 정부(政府)에서 활동하는 시기이다.

                           · 40세에 도()가 밝혀지고 덕이 이루어져지므로 비로소 벼슬길에 나아가 배운 것을 실천한다. ()에 나아가서는 근신하여

                             임사하며, 도에 부합하면 머물고, 도리에 불합하면 관을 떠난다.

                           · 50세에 대부(大夫)가 되어 국가의 대사를 맡아서 처리한다.

4 (70세 이후) : 벼슬에서 물러나 은퇴하는 시기이다. 여력이 있더라도 반드시 벼슬을 왕에게 돌려주고 물러나야 하는데, 이것은 선비로서

                             그만 두는 도리를 밝게 알고, 권력, 지위, 봉록을 탐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8세의 아동이 반드시 배워야하는 소학은 기본적으로 선비 교육에 필요한 내용들이었다. 소학을 통하여 아동으로서 갖추어야 할 예의범절과 유교적소양의 기본 덕목을 익혔는데, 소학의 첫머리에 나오는 입교편은 남성인 선비와 여성인 그의 부인이 살아야할 바람직한 삶의 과정으로 구성되어 모든 사람들이 선비로서의 삶을 살 수 없는 것은 신분과 성별에 따른 역할과 직분의 차이 때문이라 하였다.

 

2. 교육기관

조선시대에 국가가 전국을 단위로 설치한 교육기관, 成均館 , 四學, 鄕校는 오로지 선비를 대상으로 하였으며 서당이나 서원과 같은 교육기관도 마찬가지로 선비를 대상으로 하였다.

 

1) 서당(書堂)

서당은 향촌사회에 생활 근거를 둔 사족(士族)과 백성이 주체가 되어 면 · · 리를 기본 단위로 설립되었다.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다른 어떤 교육 기관보다도 숫자가 월등히 많앗고 또 오랫동안 유지되었던 사립교육기관이었다. 서당은 조정의 규제를 받거나 유림의 공론을 거쳐 설립된 것이 아니라 마음만 있으면 누구나 그 규모에 상관없이 서당을 열어 학생을 가르칠 수 있었다. 또 가장 대중화된 교육기관이었으며 양반집 자제 뿐 아니라 평민 자녀들까지 서당에서 기초 글공부를 할 수 있었다.

서당에서는 아동들에게 먼저 천자문(千字文)이나 훈몽자회(訓蒙字會)같은 교재를 통해서 한자를 가르치고, 그 다음으로 소학, 명심보감(明心寶鑑),동몽선습(童蒙先習),계몽편(啓蒙編),격몽요결(擊蒙要訣),사서오경(四書五經)등을 가르쳤다. 교육은 7~8세에서 15~16세까지 다양한 연령층을 대상으로 다양한 내용을 학생 개개인의 능력에 따라 눈높이에 맞추어 일대일로 학습을 시켜서 학년의 개념보다는 학업수행 능력에 따라 단계를 달리하였다. 양반 자제들에게 서당은 더 높은 학교에 진학하기 위한 기초과정이었던 반면, 평민 자제들에게는 처음이자 마지막 교육의 기회였다. 이런 점에서 서당은 가장 널리 처져있던 기초 교육기관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2) 서원(書院)

조선시대의 중등교육기관으로는 서울의 사학(四學)과 지방의 향교 같은 관립교육기관이 있었고, 서원 같은 사립교육기관이 있었다. 조선 중기 정치적 좌절을 겪은 사림들이 지방으로 낙향하여 후진 양성에 힘을 쏟았는데, 이것이 바로 서원이 건립되기 시작한 시초였다. 서원은 사림을 중심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에, 교육도 성리학적이고 도학적인 공부가 주를 이루었다. 성리학은 종래의 훈고학적 유학이 입신양명(立身揚名)식 출세위주의 세속적 경향을 강하게 보임에 반발하여 존심양성(存心養性)에 입각한 극기에 의해 자신을 수양하려는 의도에서 심성에 관한 문제를 주된 성찰의 과제로 삼았다. 때문에 출세를 멀리하고 향촌에 은거하여 성리학의 탐구에 노력하던 선현을 본받아 자신을 도덕적으로 완성시키고자 하는 법성현(法聲賢)’에 일차적인 목적을 두었다. 다시 말하자면 서원 교육의 목적은 자기를 수양하고 도덕적인 이념으로 정치를 이끌어가는 진정한 선비를 양성하는 데 교육목적이 있었다. 이와 같이 서원이 유교적 국가 이념을 널리 전파하였기 때문에, 조정에서도 사액서원(賜額書院) 제도를 두어 서원을 장려했다. 서원은 교육 뿐 아니라 제향(祭享)의 역할도 담당하여 학덕이 높고 충절이 훌륭한 선비의 신위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 이것은 지역 유생들 뿐 아니라 어린 학생들에게도 삶의 지표를 지정해주는 나침반의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학생들은 제사 의식에 빠짐없이 참가하면서 훌륭한 선비상을 가슴 속에 그와 같은 삶을 똑같이 살아갈 것을 암묵적으로 맹세하였다.

 

3) 향교(鄕校)

향교는 정부의 지원으로 세워진 지방의 중등교육 기관이었다. 오늘날의 공립 중·고등학교로, 중앙의 성균관보다는 낮은 학교로서 한양의 사학(四學)과 같은 등급이었다.

향교가 설립된 원래목적은 지방에 유교 이념을 널리 전파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학생들의 교육 뿐 아니라 각종 제사와 향촌의 교화에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 , , 현에 각 하나씩 설치되었고, 학생 수도 부와 목은 90, 군은 50, 현은 30명으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국가의 보조가 중단되고 흉년까지 연이어 들어 향교의 운영에 큰 지장이 생기자 결국 공교육을 담당하는 교육기관의 기능을 잃고 점차 돈 있는 지역 유지들의 이익을 옹호하는 명분의 장소로 전락해갔다. 하지만 선비들의 활동과 특권을 보장해 주는 중요한 향촌기구로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4) 성균관(成均館)

성균관은 조선시대 중앙에 설립된 국립 고등교육기관으로 소과(小科)에 합격한 후에 들어갈 수 있었다. 성균관 학생들의 생활은 매우 질서 있고 엄격하여 하루 일과는 매일 새벽에 일어나 경전을 읽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였으며, 특히 유교를 공부하는 학생으로서의 명예를 소중히 여겼다. 또 일상생활 속에서도 윤리도덕을 철저히 지키며 교수에게는 깍듯이 예의를 갖추는 등 국가의 장래를 맡아 나갈 인재로서 소홀함이 없도록 노력을 다하였다.

성균관 유생들이 공부한 주요 과목은 사서와 오경이었으며, 교육의 단계는 대학으로부터 시작해서 다음 과목으로 넘어갈 수 있도록 하였다. 사서오경을 모두 마치는 데 3년반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유생들은 매월 말에 공부한 것을 시험 보았으며, 그 결과는 국가에까지 보고되는 등 매우 엄격하였다.

 

3. 교육자료

선비의 일상에서 학문을 강론하여 익히는 과정과 절차가 빠질 수 없다. 이 일상의 과제는 평생을 두고 지속되었고, 요즘과 마찬가지로 연령에 따른 단계별 교육이 이루어졌으며, 이들을 교육하기 위한 교재 또한 달랐다. 그러나 제때에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은 나이가 많더라도 아동들이 배우는 기초교육서로 배움을 시작하였다. 조선시대 아동으로부터 성인에 이르기까지의 기본 교재를 크게 나누어보면 아동교재인 훈몽서와 유교경전, 성리서, 역사서, 지리서 등 다양 하였다.

 

1) 훈몽서(訓蒙書)

아동은 8세가 되면 비로서 가정의 교육에서 벗어나 서당에 들어가서 스승에게서 교육을 받는다. 유교이념을 지향했던 조선조에서 아동교육의 주요한 교재는 소학(小學)이었다. 소학을 통하여 아동으로서 갖추어야 할 예의범절과 유교적소양의 기본 덕목을 익혔고, 아울러 천자문(千字文),유합(類合),훈몽자회(訓蒙字會)등의 한자 입문서를 통하여 한자를 습득하였으며, 동몽선습(童蒙先習),동몽필습(童蒙必習),동몽수지(童蒙?知),아희원람(兒戱原覽),명심보감(明心寶鑑)등 초학용 교재를 학습했다. 이러한 교재들은 한자마다 아래에 음과 뜻을 달아두거나 구절마다 한글 토를 부기하여 아이들이 쉽게 익힐 수 있도록 한 경우가 많다.

 

2) 유교경전(遺敎經典)

15~6세가 되면 서원이나 향교에 들어가서 사서(四書)논어(論語)·맹자(孟子)·중용(中庸)·대학(大學)와 오경(五經)시전(詩傳)·서전(書傳)·주역(周易)·예기(禮記)·춘추(春秋)9(九齋)로 편성하여,대학에서부터 주역까지를 순차적으로 학습하였다. 이 사서오경(四書五經)은 조선시대 선비들이 반드시 익혀야 하는 필수과목 이었으며, 또 과거시험의 주요 교재로 채택되었기 때문애 과거(科擧)를 준비하는 선비들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서적이었다. 때문에 사서삼경을 비롯한 유교경전은 전국각지에서 많이 간행되어 현재 다양한 판종이 전래되고 있다. 유교경전에는 이외에도 儀禮),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 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효경(孝經),이아(爾雅)가 있는데 사서오경과 함께 십삼경(十三經)으로 일컬어지며 선비들의 주요한 교재로 활용되었다.

 

3) 성리서(性理書)

서원에서는 유고의 경전을 가장 기본적인 학습 교재로 삼았으나 이와 더불어 성리학 관련 서적도 공부하였다. 이에 해당하는 것으로는 주돈이의 태극도설(太極圖說),장횡거의 장재집(張載集),이정 형제의 이정집(李程集),주희의주자어류(朱子語類),성리대전(性理大全)등이 있다.

 

4) 기타 서적

유교를 국가 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시대였지만 유교 경전이나 성리학자들의 저서만 국한되어 공부한 것은 아니었다. 경전 학습과 함께 역사공부도 강조되었기 때문에사기(史記),자치통감(資治通鑒),송사(宋史)같은 방대한 중국 역사서도 함께 공부했으며, 게다가 정서를 함양하고 표현력을 키우기 위해 이태백시집(李太白詩集),두보시집(杜甫詩集)고문진보(古文眞寶)같은 각종 문학서적들도 공부했다. 또 역법(曆法)이나 산술, 간단한 의학지식을 쌓는 학습도 간간히 이루어졌다. 하지만 정통 유교의 정신을 해치는 이단사설로 여겨졌던 노장철학이나 불교와 같은 책은 절대 금지 되었다.

 

 

Ⅲ. ·현대 교과서의 변천과정

 

흔히 교과서는 교육에 사용되는 교재를 교수학습에 편히한 형태로 편집한 도서를 말하는데, 과거의 지식을 담아 현재의 사람들에게 교육하고 후대에 그 지식을 발전시켜 물려주기 위한 수단 중 으뜸이라 할 수 있다. 교과서는 19세기 후반의 개화기 때부터 현재까지 그 발전과 변화 및 변천과정은 대체로 여러 관점에서 나누어지지만 여기서는 개화기, 광복 및 정부수립기, 교육과정 적용기(1~7)로 나누었다.

 

1. 개화기(1800년대~1910)

16세기 초 실학자들이 서구의 문물을 배우고 접하는 과정에서 18세기 정조 때에 이르러 실학자들을 중용하고, 그들의 학문이 정점을 이루고 19세기에는 사회적, 제도적인 측면에서 실질적인 개혁으로 나타났다. 그 결과 우리나라의 사회적 문화혁명이라 할 수 있는 갑오개혁(1896)이 실현되었다.

이로 인해 근대화를 위해 필요한 사회 전반적인 개혁을 촉구하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교육에 대한 부분이 개혁의 현안 중의 하나로 자리 잡으면서, 이에 따라 근대교육을 위한 교과용 도서의 생성을 불러온 원인이 되었다.

 

1) 편찬배경

19세기 후반 서구의 신문물이 급물살을 타고 한반도에 유입됨에 따라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측면에서 혼란과 변혁을 초래 하였고 이에 크게 영향을 받은 분야 중 교육도 제도적인 개혁으로 말미암아 글방(서당)형태의 교육기관을 지양하고 근대적 모형의 학교 교육을 도입하게 되었다.

교육기관 및 교육 관제의 잇따른 공포로 제도적인 기틀이 마련되고, 그에 따른 편찬·발행 또한 뒷받침 되었다. 그리하여 이러한 과정은 세 가지의 문서 포고로부터 비롯한다.

①1894628일 학무아문 관제 선포, 7월에 고시

②189517일 고종에 의한 홍범(洪範) 14개조를 포함한 독립서고문(獨立誓告文) 발포

독립서고문에 의한 같은 해 22일 조칙으로 발한 교육칙어(敎育勅語)

 

2) 교과서 편찬

근대 교과서는 그 적용면에서 두 가지 사례로 살필 수 있는데, 그 첫째는 1883년 봄에서 여름 사이의 최초의 민간 교육기관인 원산학사에서 사용한 교과서들이고, 두 번째는 1895년 정부 직제의 근대화 개혁에 따른 학부의 발족에 의해 나오기 시작한 신식 교과서이다. 이 두 시기의 교과서는 신문물을 전수하기 위한 개명 매체로 보급할 목적은 같았으나 전자는 민간에서 선택 및 사용한 것이고, 후자는 정부 편찬·발행했거나 검정한 것이라는 것이 차이점이다.

 

3) 교과서 출판의 특징

①1885~1905

우선 서명을 표시하는 방법은 제첨을 붙이거나 별쇄하여 표시 왼쪽 상단에 붙이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본문의 활자는 후기 교서관 활자 및 신체 목활자 혼용 또는 목판을 사용하다가 신식 연활자로 바뀌어 갔다. 용지 사용에서 표지는 배접한 종이에 능화문 처리를 하는 방식을 사용하였고, 본문지는 대부분 한지를 사용하였다. 장정은 대부분 5침선장을 하였다. 표기 방법은 국·한문 혼용, 순한자 표기 체제를 병행하였다.

②1906~1910

앞의 시기와 같이 제첨형식을 같이 썻는데, 점차 표지에 직접 인쇄하는 방법을 사용하였고, 본문은 신식 연활자를 이용하여 표기하였다. 그리고 조판 방식은 앞 시기에서는 세로짜기 형식을 사용하였는데, 점차 가로짜기 방식으로 변화하였다. 용지는 일본의 조지국(造紙局)에서 생산한 용지를 사용하였는데, 이 시기부터 표지와 면지를 분리하기 시작했으며, 본문의 용지는 한지를 사용하지 않고, 양지를 사용하였다. 장정의 형식은 4침 안정법의 한 장본 형식을 취하다가 책등을 덮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표기 방법은 비슷하나 아라비아 숫자에 의한 산식(算式)짜기 형식이 등장하였다.

 

2. 일제강점기(1910~1945.8.)

일제 침략 세력의 식민화 전략은 철저히 우리민족을 우민화(愚民化) 하는 데에 목적을 두었다. 점차 한국인 뇌리에 열등의식을 심어 황국 신민사상을 주입하고자 하였다.

을사조약이 체결되기 직전 190510월 일본 내각회의에서는 한국에 대한 통치 방침에서 교육에 관해서는 교육은 한국 신민으로 하여금 일본에 감화 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라고 하여 한국에 대한 교육 방침을 동화교육에 독적을 둘 것을 분명히 했다.

 

1) 민족교육의 수난기

조선은 신문물을 광범위하게 교육에 수용하기 위해 신식 교과서 편찬·발행 사업을 일으켰으나, 1905년 을사조약 체결에 의해 자주적인 출판·보급 활동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실제적인 출판 권한(편찬, 검정, 인가)을 일본인들이 행사하였기 때문에 대한제국의 학부는 유명무실한 기관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일제의 침략 지휘부라 할 수 있는 통감부는 19077월에 학부 편찬 교과용 도서 발매 규정을 제정하여 대한제국 황제의 칙령또는 학부의 학부령으로 공포를 하여 식민교육을 위한 교육제도기반을 구축하고 그와 동시에 각급 학교의 교육과정을 편성하게하고 교과서도 편찬하였다. 일제는 이와 같은 제도적 장치를 앞세워 힘없는 조선정부를 앞세워 교과서를 통한 우민화 정책을 추진하고 있었다. 그리고 초등, 보통, 고등학교 교과과목에 일어시간을 필수과목으로 넣어 많은 수업시간을 배당했다. 또한 역사와 지리수업은 교과과정에 편성하고도 수업시수를 배정하지 않았고, 배정하더라도 적게 넣어 민족의 애국심, 역사의식 함양에 관한 내용을 소멸시켰다.

 

그 과정에서 언어에 대한 침탈도 이어졌다. ‘내선일체를 부르짖던 일제는 조선어 박멸에 나서 19372, 조선총독부의 내무국장이던 오다케(大竹十郞)는 조선어 통역을 폐지하고 일어 상용을 명했고, 이어 4월에는 미나미(南次郞) 총독의 명령으로 조선어 교육이 폐지되었다.

 

2) 출판형식의 특징

일제 강점기의 교과용 도서에 적용된 출판 형식을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한국인 학생이 사용하는 교과서에 우민화 전략을 삽입하여 스스로가 부정하게 하고, 폄하하게 하엿으며 일왕(日王)을 중심으로 하여 제국주의의 이념 주장을 강조하여 조선인에 대한 정체성을 부정하였다. 둘째, 경성(서울)에 근대화된 인쇄사(印刷社)를 설립하여 식민수단을 위한 신식기술을 이용한 교과서를 출판, 보급하고 교과서를 통해 조선이 일본의 일부라는 예속심리와 내선일체’, ‘황국신민이라는 이념을 계속하여 주입시켰다. 셋째, 교과서 제작관련 기술적 사항 중 활자 크기, 삽화 안배, 컬러 인쇄 방식, 인쇄에 갱지를 사용, 제본방식의 체제 개선이 시도되었으며, 내용 편차 중 일왕에 의한 공포한 문건을 수록하여 교과서를 통해 제국주의 극대화를 도모했다.

 

3. 광복 및 정부수립기(1945.8. ~ 1954.4.)

광복이 되면서 일제에 의해서 이루어지던 모든 식민 통치활동은 사실상 끝나게 되었으나 미군정의 행정력이 영향력을 미치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교육과정에 관한 내용이 처음으로 포함된 일반명령 제4에서 교수용어를 한국어로 할 것과 조선의 이익에 반하는 교과목은 일체 교수함을 금한다.”라는 항목을 제시했고, 평화와 질서를 교육목표로 삼아 일제 잔재를 말살하도록 하였으나 일본 교과서의 사용을 금하는 정도에 그쳤다.

 

그 이후 미군정 학무국은 교육 내용 결정이 시급함에 따라 교수요목을 제정하고 조선의 교과서 편찬 및 발행을 서둘렀다. 하지만 이전에 조선어학회에서 임시국어교재의 편찬을 결의하고 곧 편찬을 시작하였다. 군정이 시작되면서 학교를 설치하고 개교를 하였는데, 우선은 조선어학회가 편찬한 국어책을 교재로 선택하여 각 학교에 배부하여 우리의 말과 글 공부에 도움이 되게 하였다. 계속하여 군정청 학무국은 공민, 역사, 지리, 음악, 이과 교과서를 발행하였고, 진단학회는 역사, 지리교과서를 편찬하였다. 또한 학무국 편수과에서는 국사 교과서를 만들었는데, 이를 각군 학무계에서 프린트하여 학생들에게 배부하도록 하였다. 이 당시 교과서 편찬이 얼마나 열악한 환경에서 이루어졌는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부분이다.

 

위의 국정 교과서 이외의 중등학교 교과서는 국내 학자들이 저술한 교과서들이 사용되었는데, 이 기간에 편찬된 교과서는 국가 교육법이 제대로 제정되지 않았던 탓에 교과서로서의 미흡한 점이 많았고, 인쇄시설과 용지 사정이 좋지 않아 교과서의 체제를 갖추지 못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교육이념에 따른 교육법도 1949년에 제정되어 새로운 교과서의 편찬이 시급한 상황이었다. 그리하여 교과과정에 맞는 시간 배당과 재정심의를 시작할 즈음에 전쟁의 발발로 모든 것이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6·25전쟁으로 인해 교육이 마비되자, 문교부는 1951전시 임시 교육 요항을 만들어 이를 추진하고 학생들의 전시생활을 지도하기 위한 임시교재를 만들어 피난 학생들에게 무료로 배포하였다. 이 때 만들어진 교재가 전시생활,전시독본등이다.

 

그 이후 19529월부터 쓸 수 있도록 정식 교재로 국어·셈본·사회생활·과학 등의 네 과목 교과서 21, 중등국어 6종을 편찬하였으나 전시중이라 형편이 여의치 않아 출판이 힘들었다. 다행히 미국 자유아시아위원회의 도움으로 위의 27종과 5-6학년용 가사,농사짓기를 합쳐 한꺼번에 인쇄할 수 있었다.

 

4. 교육과정 적용기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국가의 주요 법제가 제정되고 그에 따라 교과과정에 따른 교육법이 만들어지고 미군정의 잘못 설정한 교수요목과 전쟁 등의 시행착오를 겪으며, 오늘날까지 이르렀다. 19541차 교과 과정기부터 2007년 제 7차 교과 과정기까지의 교과서 편찬의 과정을 교과과정 별로 7단계로 나누어 그 단계별로의 특징과 변화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1차 교과 과정기 교과서(1954.4.~1963.2.)

1차 교과 과정기에서는 교과과정이 정식으로 성립되고 교과 교육 중심으로 한 교과서가 만들어졌고, 또한 생활을 중심으로 한 교육과정을 반영했으며 단원학습제를 도입하여 교과서의 편제가 교과 과정의 틀에 맞도록 노력했다. 주로 흥미 위주로 편성을 했으며 이를 통해 자기 생활과 경험을 능동적으로 확충하도록 이끌었다는 것이 이 시기 교과서의 특징이다.

 

2) 2차 교과 과정기 교과서(1963.2.~1973.2.)

2차 교과 과정기에는 생활 및 경험을 강조한 교육내용이 반영되었고, 자주성, 생산성, 효용성을 강조했다. 그리고 박정희 정부의 새마을 정신이 반영되었으며, 일부 교과서에서 단원도입문, 연습문제 등 본문에 대응한 체제가 생긴 것이 특이한 점이다. 그리고 컬러 삽화가 많이 등장한 것이 이 시기이다. 특히 초등학교 4학년 이상의 교과서(1970년부터)와 중·고등학교 모든 신편 도서에 국민교육헌장의 게재를 필수로 했다.

 

3) 3차 교과 과정기 교과서(1973.2.~1981.12.)

3차 교과 과정기에는 학문중심의 교육과정을 우선으로 삼고, ‘민족 주체 의식 배양에 이념적 지표를 두고자 하였다. 윤리, 국어, 사회 등 보통 교과의 교과서 내용에 국민 교육 헌장 이념유신 이념이 반영되었다. 시대상의 이데올로기를 교과서에 담았던 시기라 할 수 있다. 특히 1979학년도부터는 연구·개발형 교과서가 발행되는데 모든 교과서에 6쪽 이내의 원색 화보를 실어야 한다는 방침이 생겨 편찬의 보완이 이루어졌다.

 

4) 4차 교과 과정기 교과서(1981.12.~1987.6.)

이 시기에는 건전한 심신 육성, 지력과 기술 배양, 도덕적 인격 형성, 민족 공동체 의식 고양의 4대 지향점이 기본 틀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와 함께 미래에 대한 적응력 개발과 통일 지향 등을 중시했다. 그리고 4차 교과 과정기부터 자율학습 강화를 위한 교과서 편찬 체제의 개선을 강조하였고, 이 시기 문교부는 편찬 체제에 관한 규칙을 매년 발표하여 신편도서에 적용하였다. 이로 인해 교과서 편차는 표지-화보-머릿말-차례-본문-찾아보기의 6단계로 골격을 이루게 되었다.

 

5) 5차 교과 과정기 교과서(1987.6.~1992.6.)

5차 교과 과정기에서는 가치관 배양에 중점을 두고, 정보, 경제, 지역에 관한 교과 교육을 강화하였다. 따라서 초등학교 교과서에 1교과 다교과서제를 도입하고 새로운 전개를 보여주었다. 학생들로 하여금 직접 교과서에 그림을 그려 넣는 방법이나, 학습내용을 직접 적는 등의 응용 체제 방식을 도입한 것이 특징이다.

또한 다교과서제에 대해 예를 들면 국어과에 말하기, 듣기, 쓰기, 읽기로 나누고 산수과에 산수와 산수익힘책, 바른생활은 바른생활, 바른생활이야기, 슬기로운 생활은 슬기로운 생활과 관찰 등으로 나누었다.

 

6) 6차 교과 과정기 교과서(1992.6.~1997.12.)

6차 교과 과정기에는 미래를 대비한 교육개혁을 중심으로 하여 건강, 자주적, 창의적, 도덕적인 사람을 추고하도록 교육 과정의 방향을 설정했다. 특히 교과서 편찬에 있어서 자율 학습이 가능한 교과서를 선보이는데, 이 과정의 교과서는 광복 후 최초의 성과라 할 수 있다. 교과용 도서의 편찬 또한 교과용 도서의 체제 기준이라는 문건으로 발표되어 가장 구체적으로 틀을 제시했다. 그리고 이시기부터 인쇄매체만을 지양하여 오디오, 비디오 자료도 개발, 보급하기 시작했는데, 1996학년도에 초등학교 3,4학년 영어교과서를 만들면서부터 시작되었다.

 

7) 7처 교과 과정기 교과서(1997.12.~2007.2.)

이 시기에서 추구하는 기본방향은 개성 추구, 창의적인 능력, 폭 넓은 교양을 바탕으로 한 진로 개척, 새로운 가치 창조, 시민 공동체의 발전에 공헌을 하는 사람을 양성하는 것이다. 따라서 교과서 또한 창의력과 자기 주도적 능력을 신장하는데 그 목표를 두고, 수준별 교과서(보충, 심화교재)의 편찬을 중심으로 하였다.

 

 

Ⅳ. 인당박물관 소장 자료

 

1. 고서

인당박물관 소장의 고서는 183488책으로 대부분이 조선후기에 간행된 인본이다. 주제별로 보면 사서삼경을 비롯한 경서류가 가장 많고, 나머지는 역사류·훈몽서·소설류·문집류·옥편류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 중 훈몽서는 19세기말에서 20세기초에 아동교육을 위해 간행된 천자문류의 한자 학습서와 동몽선습,명심보감,격몽요결등이며, 옥편류에는 어정규장전운(御定奎章全韻),전운옥편(全韻玉篇)등이 있다.

 

판종별로는 목판본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한글소설인 구운몽장화홍련전2종과, 서당강습계안(書堂講習契安)등은 사본이다. 금속활자본은 1836년에 정유자로 간행된 崇禎紀元後四己未曾廣司馬榜目(숭정기원후사기미증광사마방목)1, 목활자본은 학부편집국(學部編輯局)에서 1895년에 간행한 만국지지(萬國地誌)1종이 소장 되어있다. 경람도(敬覽圖)는 석인본으로 본문에 포함된 그림은 채색되어 있다.

 

소장고서중 귀중본이라 할 수 있는 몇 가지를 소개하면, 갑인자 번각본인 근사록(近思錄), 정유자본인 숭정기원후사기미증광사마방목(崇禎紀元後四己未曾廣司馬榜目), 학부목활자본인 만국지지(萬國地誌),구운몽(九雲夢),서전(書傳), 한글 소설인 구운몽장화홍련전등이 있다.\

 

2. 고문서

현재 소장중인 고문서의 현황을 살펴보면, 科紙, 敎旨, 明文, 戶口單子를 비롯한 13250여점의 고문서가 소장되어 있다. 이 중 호구단자가 73점으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으며 준호구 45, 명문 39점 등 일반생활 속에서 생산되는 문서가 다량을 차지하고 있다. 연호가 확실히 나오는 문서를 기준으로 볼 때 대체적으로 19세기 자료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시기적으로 가장 빠른 문서는 건륭 25(1760)에 작성된 토지매매문서이다.

 

 

<소장 고문서 현황>

순번 문서종류 건수 순번 문서종류 건수 순번 문서종류 건수

1 科 紙 2 6 分財記 1 11 通 文 10

2 敎 旨 19 7 簡 札 2 12 戶口單子 73

3 輓 記 2 8 所 志 6 13 戶籍表 33

4 望 記 5 9 準戶口 45 합계 250

5 明 文 39 10 帖 13

 

3. ·현대 교과서

대구보건대학 인당박물관 소장 개화기 이후 교과서를 살펴보면 총 4,205권이며, 그 중 개화기 교과서 15,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발행 교과서 609권 등 이후 1990년대 교과서 까지 다량 보유하고 있다. 소장 교과서를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시기별 교과서 현황>

1. 1910년 이전(개화기) 15 권

2. 1910~1945(일제강점기) 609 권

3. 1945~1950180권(군정청자료 11권 포함)

4. 1950~1960930권

5. 1960~19701,273권

6. 1970~1980997권

7. 1980~1990172권

8. 1990년 이후 29권  총4,205권

 

이 중에서도 조선말기의 학자이자 서예가인 현채(玄采)가 번역하여 1906년에 발행한 만국사기와 미국 출신 선교사인 헐버트가 번역하여 1908년 내놓은 생리학초권(生理學初卷)은 우리나라 생리학 연구사에 있어 아주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 이외에도 조선어학회에서 해방 다음해 발행한 임시교재인 초등국어교본이나 육당 최남선이 국민정신 함양을 위해 간행한 중등국사또한 당시의 국어·국사교육을 알 수 있게 하는 좋은 자료이다.

 

 

 

Ⅴ. 맺음말

 

이상에서 조선시대 교육의 주요내용과 근대화 이후의 교과서 변천발달에 대해 알아보고 소장 자료의 종류와 수량, 간단한 내용 등을 파악해보았다. 그 결과 인당박물관 소장자료 중 고서, 고문서류에서는 대체로 희귀본이나 중요자료는 크게 보이지 않으나, 조선시대의 선비들이 공부했던 흔적들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기회가 되었다.

 

그리고 근대 교과서 부분에서는 대체로 일제강점기, 그리고 50~70년 사이에 발행했던 자료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많은 수의 교과서들을 과목별, 시대별로 다량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근대화이후 90년대까지의 교과서 변천사를 한눈에 보여준다.

이전에도 교과서 변천사에 대한 연구가 여러 연구자들에 의해 많이 이루어졌지만 대구보건대학 인당박물관 소장 교과서 또한 향후 연구에 많이 보탬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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